지체장애 2급인 이모 씨(61·광주 서구 금호1동)는 폐지를 팔아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는 기초생활수급자다. 이 씨는 두 달에 한 번 정부에서 쌀 20kg짜리 한 포대를 받지만 끼니를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1주일에 한두 번 금호1동 주민센터를 찾는다. 주민센터 현관에 누구나 필요한 만큼 쌀을 가져갈 수 있는 ‘사랑의 쌀뒤주’가 있기 때문이다. 이 씨는 누군가가 채워놓은 사랑을 퍼가며 사람 사는 세상의 온기를 느끼고 있다.
○ 이웃사랑을 나누는 곳간
금호1동 주민센터가 2006년 1월 시작한 ‘사랑의 쌀뒤주’가 혼자 사는 노인과 기초생활수급자 등 어려운 이웃에게 ‘따스한 곳간’이 되고 있다. 그동안 이 뒤주를 이용한 주민은 2만1782명으로 집계됐다. 금호1동은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계층이 1900여 가구, 3300여 명으로 서구에서 저소득층이 가장 많은 곳이다.
주민센터는 전남 구례에 있는 ‘운조루’(雲鳥樓·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 제8호)에 있는 쌀뒤주에서 영감을 얻었다. 운조루는 영조 52년(1776년) 낙안군수 류이주(柳爾胄)가 세운 99칸짜리 한옥. 이곳에 있는 통나무 뒤주는 류씨 집안의 선행을 알리는 증표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뒤주 밑부분 구멍 마개에 쓰인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씨는 유명하다. ‘누구나 마음대로 쌀을 퍼갈 수 있다’는 의미다.
사랑의 쌀뒤주는 지금껏 한 번도 바닥을 보이지 않았다. 뒤주의 뚜껑을 처음으로 연 후 지금까지 1700여 포대(1포대 20kg), 시가로는 8400여만 원어치가 꾸준히 채워졌다. 쌀 80kg이 들어가는 뒤주는 아래에 쌀 1되(800g)가량이 담겨 있는 서랍장이 있다. 이를 당기면 쌀이 쏟아진다. 하루에 쌀이 많이 나갈 때는 150명이 한 끼를 먹을 수 있는 320kg가량이 나갔다. 김명숙 사회복지사(48·여)는 “뒤주 옆에 놓아 둔 ‘이용대장’은 복지 사각지대를 없애는 역할을 하고 있다”며 “자주 이용하는 주민이 오지 않으면 집을 찾아가 안부를 살피고 거동이 불편하면 쌀을 가져다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 7년간 쌀 보내는 후원자들
뒤주에서 쌀을 퍼가는 노인들은 “옛날 보릿고개 시절 생각이 난다”며 고마워했다. 직원들이 ‘미안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고 따뜻한 밥을 지어 드세요’라며 쌀을 퍼줄 때는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다. 보답하고 싶어도 마땅히 줄 게 없다며 텃밭에서 기른 채소를 가져오거나 콩물이나 미숫가루를 건네는 주민도 있다.
퍼간 사람이 있으면 주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뒤주에 끊임없이 사랑을 채울 수 있었던 것은 7년 넘게 쌀을 보내는 후원자들 덕분이다. 서광병원과 무등교회, 금호베델교회 등은 2006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매달 쌀을 보내왔다. 금강건업 김재준 사장은 3개월 전 휠체어를 타고 온 장애인과 70, 80대 노인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줄을 서 쌀을 가져가는 것을 보고 후원을 결심했다. 김 사장은 매달 정미소에서 갓 도정한 쌀 200kg을 승용차에 싣고 온다. 김 사장은 “어릴 적 배고픔의 설움이 너무 컸던 탓에 어려운 이웃에게 작은 도움을 드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밝은광주안과, 송죽고을식당, 박한의원, ㈜태영유리, 금호로타리클럽, 금호동성당, 서창농협, 주민 김형성 씨도 매월 정기적으로 쌀을 후원해 주고 있다. 이들이 보내준 쌀은 주민센터 창고에 놓아뒀다가 뒤주가 바닥을 보일 때쯤 채워 넣는다. 장기영 금호1동장은 “기업과 사회·종교단체, 주민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라며 “뒤주가 언제까지나 이웃 사랑의 화수분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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