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추가 으스러지고 갈비뼈 6개가 부러졌다. 부러진 뼈의 끝이 날카로운 창이 되어 폐를 찔렀다. 숨쉬기조차 힘들었지만 살아남은 게 다행이었다. 전국에 한파가 엄습한 날, 그의 몸은 피로 뒤덮였다. 1987년 1월 13일자 동아일보의 사회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13일 새벽 2시 50분경 서울 은평구 불광3동 104의 1 주택가 앞길에서 정원을 초과한 채 18명을 태우고 달리던 서울8 러7989 봉고트럭(운전사 徐○○)이 빙판길에 미끄러지면서 길 옆 전신주를 들이받아 운전사 徐 씨 등 4명이 숨지고 宋○○ 씨 등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정원초과 음주운전… 예견된 사고
사고 전날. 군대에 가는 친구를 환송한다는 핑계로 서울 은평구에 살던 고교 동창들이 모였다. 그 가운데 정진완 씨(47)도 있었다. 정 씨는 다른 일이 있어 자정이 다 돼서야 친구들이 있는 나이트클럽에 합류했다. 한 친구가 “이게 5차야”라며 자랑스럽게 떠벌렸다. 대낮부터 술을 먹은 친구들이 옆자리 손님들과 시비가 붙었다. 손님들은 스무 명 가까운 ‘불량청년’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한바탕 난리를 피운 뒤 싸움은 싱겁게 끝났고 누군가 축하주를 먹자고 했다. 장소는 동네 형이 운영하는 당구장.
친구 한 명이 차를 대기시켜 놨다. 자신이 일하는 전자 대리점의 배달용 차량이었다. 6인승 봉고트럭에 17명이 몸을 실었다. 6명은 좌석에 앉고, 11명은 짐칸에 탔다. 일행이 당구장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마침 그곳을 지나던 또 다른 동창생을 만났다. 그가 합류한 게 화근이었다.
“○○가 왔으니 드라이브 한 번 하고 더 마시자.”
잔뜩 취한 일행은 도로를 질주하며 소리를 질렀고 노래를 불러댔다. 차가 언덕을 넘어 내리막길로 들어서고 있었지만 누구도 위험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철이 없기에 무서울 것도 없었다. 운전석 뒷자리에 타고 있던 정 씨도 마찬가지였다.
차가 빙판을 지나면서 휘청거렸다. 브레이크는 듣지 않았고 차는 더 빨라졌다. 앞서 서행하던 택시를 피하려 핸들을 돌리자 전신주가 보였다.
“꽝….” 굉음과 함께 전신주는 부러졌고 차도 부서져 도로 위를 굴렀다. 짐칸에 타고 있던 11명은 짐짝처럼 흩어졌다. 50m 가까이 날아간 사람도 있었다는 얘기를, 정 씨는 나중에 들었다. 운전을 한 친구도 마지막에 합류한 친구도 그 자리에서 죽었다. 죽지 않은 친구들은 대부분 장애인이 됐다.
인생은 쾌락… “짧고 굵게 살자”
몇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떠 보니 동네병원이었다. 간신히 손을 움직여 지나가는 간호사를 붙잡았다.
“나는 정진완이고요, 우리 집에 전화 좀 해 줘요. 번호는….”
어릴 때부터 공부보다 운동을 좋아했던 정 씨였다. 고향인 전남 함평에 있는 월야초등학교에 다닐 때 축구와 씨름을 했다. 월야중학교에서는 하키부원으로 활동했다. 아버지의 생각은 정 씨와 달랐다. 운동을 하면 춥고 배고픈 줄 알던 시절이었다. 스틱을 잡았던 막내아들의 손에 억지로 참고서를 쥐여줬다.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인문계 고교(광주일고)에 진학했지만 아들의 마음 속에는 반항심만 커져 갔다. 아버지는 한술 더 떠 서울로 이사를 갔다. 정 씨는 광주에서 한 학기만 다닌 뒤 서울로 전학을 가야 했다.
처음 와 본 서울은 별천지였다. 술을 마실 곳도 여자를 만날 곳도 많았다.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낸 정 씨를 받아줄 대학은 없었다. 재수를 한답시고 집을 나와 친구들 거처를 전전했다. 재수학원은 두 달 만에 때려 치웠다. 돈이 필요하면 막노동을 했다. 건장한 체격에 어릴 때부터 운동으로 단련된 정 씨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돈을 벌어 생활을 하고 유흥을 즐겼다. 가족은 남이었고, 친구들이 가족이었다. 명목상 재수생이었지만 1986년 대입 학력고사는 치르지도 않았다. 스물한 살 정 씨에게 인생의 목표는 쾌락이었고, 인생의 좌우명은 어울리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짧고 굵게 살자’였다.
최악의 사고, 새로운 인생을 열다
“집을 팔아서라도 너를 살릴 거다. 꼭 살릴 테니 걱정 마라.”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 가족이 있었다. 꿈자리가 뒤숭숭해 새벽에 깼던 어머니가 간호사의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망연자실한 부모님을 대신해 아홉 살 위 형(정진후·정의당 국회의원)이 동생의 손을 잡고 말했다.
가족들은 2남 2녀 중의 막내인 정 씨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또 싸움을 하다 칼부림을 당했을 거라고 여겼다. 사고를 당하기 전 막내아들은 그런 존재였다.
동네병원에서 치료할 수 있는 부상이 아니었다. 서울 중구 을지로 백병원으로 옮겼고 여러 차례 큰 수술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믿었다. 얼마 뒤면 멀쩡하게 두 발로 병원 문을 나설 것이라고. 친구들이 다 장애인이 돼도 나만큼은 괜찮을 것이라고.
척추를 다쳐 다리를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며칠 뒤였다. 183cm, 75kg의 건장한 체구를 지탱해 주던 다리, 누구보다 빠르고 단단했던 그 다리는 이제 만져도 감각을 느낄 수 없게 됐다. 혹독한 통증만 전달하는 다리였고 덜렁거리는 물건일 뿐이었다.
어머니 혼자 체격이 큰 아들의 대소변을 받아내기에는 힘이 부쳤다. 신혼이었던 형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6개월 가까이 동생 옆을 지켰다. 누나들도 자주 문병을 왔다. 각자 살기 바빴던 가족들은 그렇게 한자리에 모였다.
가족들의 위로가 고마웠지만 장애인이 됐다는 허망함을 덮어줄 수는 없었다. 휠체어에 앉아 거동할 수 있게 된 뒤로 정 씨는 술에 빠져 살았다. 사고 차량이 보험에 가입한 데다 영구장애 판정을 받았기 때문에 손에 쥔 보험금 1억 원을 모두 술로 탕진한 뒤 삶을 마감할 작정이었지만 그럴 용기조차 없다는 게 정 씨를 괴롭혔다.
백병원에서 10개월을 보낸 뒤 그해 개관한 세브란스 재활병원을 찾았다. 새로운 인생을 열게 된 계기였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장애인들을 보며 위안을 얻었고 ‘장애인 선배들’을 따라 운동을 시작했다. 휠체어농구에 빠져 있던 정 씨는 1988년 서울 장애인올림픽(패럴림픽)을 현장에서 보며 금메달의 꿈을 품었다. 휠체어농구로는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1989년 2월 사격에 입문했다. 중학생 때부터 마시던 술도 끊었다. 휠체어 영업 사원을 하면서 훈련에 몰두했다. 1994년 베이징 장애인아시아경기에서 은메달을 딴 뒤부터 대표팀 에이스로 활약했다. 그리고 2000년 시드니 패럴림픽 공기소총 10m 입사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꿈에 그리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후 ‘지도자 수업을 하라’는 주위의 권유를 받아들여 2003년 용인대 특수체육과에 입학했고 그해 후배들의 요청으로 장애인체육 선수위원회 부회장을 맡았다. 당시만 해도 보건복지부 산하에서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장애인체육을 문화체육관광부가 맡도록 하는 게 그의 주요 임무였다. 2004년 아테네 패럴림픽이 끝난 뒤 마련된 청와대 오찬에서 그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게 장애인체육의 이관을 건의했고 대통령은 동의했다. 이듬해 정부 발의로 국민체육진흥법이 개정돼 장애인체육은 문체부 소관이 됐고 2005년 11월 장애인 선수들의 숙원이던 대한장애인체육회가 설립됐다.
다리를 잃고 가족을 얻다
정 씨는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의 공모를 통해 장애인체육과 과장이 됐다. 장애인체육 선수 출신이 장애인체육 실무를 총괄하는 이 자리에 앉은 것은 그가 처음이다.
“사고를 당한 뒤 여러 차례 선택의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도움을 주시는 분들을 만났다. 덕분에 운동을 시작해 금메달을 땄고, 대학에 입학했고, 장애인체육 행정을 경험했다. 운동을 한 덕분에 극한의 상황을 버틸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이 가장 큰 소득이다.”
2000년 시드니 패럴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뒤 어느 날. 자고 있던 정 과장은 누군가의 흐느낌을 들었다. 술을 한 잔 마시고 집에 온 아버지가 감각 없는 아들 다리를 어루만지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우리 막둥이가 이렇게 운동을 잘 하는 줄 몰랐네. 세계 챔피언이 돼서 대통령 훈장까지 받았구나. 미안하다 우리 아들.”
그때까지 남아 있던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은 그렇게 조금씩 풀어져 갔다. 아버지 정관모 씨는 2003년 68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았다. 세상을 떠나기 몇 시간 전 아들은 아버지와 둘만의 얘기를 나눴다. 아버지는 막내에게 어머니를 부탁했다.
정 과장은 지난 주말 오랜만에 안양의 어머니 집을 찾았다. 정 과장이 2011년 충남장애인체육회 사무처장으로 직장을 옮긴 후 홀로 사시는 어머니다. 정 과장은 출퇴근 때문에 문체부 근처 원룸에 거주한다.
“엄마, 건강해야 오래 살지. 나도 몸이 불편해 잘 돌볼 수 없으니까 평소에 열심히 운동해야 돼.”
아이처럼 아직도 ‘엄마’라고 부르는 40대 후반의 아들은 집안 곳곳에 운동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어 놨다. 스트레칭 방법 등 운동하는 노하우도 수시로 알려 준다. 정 과장은 패럴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덕분에 매달 100만 원의 연금을 받는다. 모두 어머니에게 용돈으로 드린다. 어머니는 그 돈으로 한 달에 한 번 노인정에서 한턱을 내며 아들 자랑을 한다.
참을 수 없는 통증으로 괴로워하는 아들의 몸을 밤새 주무르던 어머니였다. 사경을 헤매던 아들과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부터 한동안 눈물이 마를 새 없던 어머니였다. “내가 대신 다쳤어야 되는데…, 내가 너 대신 아파야 하는데…” 입버릇처럼 되뇌던 어머니였다. 그랬던 어머니 승길임 씨(76)는 요즘 아들을 볼 때마다 활짝 웃으며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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