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窓]가정폭력에 무너진 탈북女 ‘코리안 드림’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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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되면 굶주림에 시달린 북한 주민들은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북을 시도한다. 김경자(가명·44·여) 씨도 그랬다. 2001년 초 김 씨는 목숨을 걸고 폭 48m의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넜다. 탈출엔 성공했지만 북한군에 붙잡혀 돌아갈 것이 두려웠던 김 씨는 차 한 대를 얻어 탔다. 그 차에 인신매매단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김정일 지옥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한국행을 택했지만 김 씨는 또 다른 지옥에 떨어졌다. 그녀가 팔려 간 곳은 중국의 한 시골 마을. 나이 든 한족 남성과 강제로 혼인한 김 씨는 아들까지 낳고 약 7년 동안 반(半)감금 상태로 살았다. 2007년 둘째를 임신한 김 씨는 야반도주한 뒤 탈북 브로커를 통해 한국 땅을 밟았다. 화장품 외판원 생활을 하던 김 씨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과정에서 자신을 도와준 중국교포 이모 씨(38)를 초청해 이듬해 이 씨와 결혼했다. 자신이 한국에서 낳은 아들과 남편이 데려온 딸을 함께 키우며 행복한 미래를 꿈꿨다.

하지만 남편의 폭력 앞에 그녀의 ‘코리안 드림’은 산산조각 났다. 또다시 ‘생지옥’을 만난 것이다. 밤늦게 술 취해 집에 온 이 씨는 “오늘은 또 어떤 놈이랑 놀아났느냐”며 잠자고 있는 김 씨의 얼굴에 칼과 망치를 들이댔다. 중국교포라 결혼 생활을 유지해야만 혼인비자를 받을 수 있었던 이 씨는 아내가 ‘헤어지자’는 소리를 입 밖에도 못 내도록 때리며 겁을 줬다.

폭행과 스트레스로 뇌경색을 앓게 된 김 씨가 7월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자 남편은 이불 가득 기름을 붓고, 유리창과 가전제품을 모조리 부쉈다. 피 묻은 손으로 흰 냉장고 문짝에 “이제 모두 끝이다. 죽여버리겠다. 또 오겠다”는 글을 남겼다.

관내 탈북자를 관리하던 마포경찰서 보안계 송지원 경위는 김 씨의 안색이 올해 유난히 안 좋아졌다는 것을 느꼈다. 송 경위는 그녀를 불러 가정 형편을 자세히 묻기 시작했다. 김 씨는 부끄러운 집안 이야기라 아무에게도 꺼내 놓지 않았던 고충을 송 경위에게 털어놓았다. 마포경찰서는 지난달 초 이 씨에 대해 사전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도주한 이 씨는 자신이 수배 상태인 것을 알면서도 ‘내 마누라 어디 있느냐?’며 경찰서에 전화를 할 정도로 뻔뻔함을 보였다. 그는 결국 지난달 20일 구속 수감됐다.

가정폭력 사건에 대해 경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송 경위는 “남한 사정을 모르고, 도움을 구할 지인이 없는 탈북여성들은 ‘가정폭력’ 단속에서도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편”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말 여성가족부가 탈북여성 14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가정폭력 등 신체폭력을 경험한 탈북 여성은 전체의 37%로 한국 여성 평균(15.3%)의 두 배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폭행 또는 성추행을 당한 여성도 44%나 됐다. 이런 피해들은 탈북 과정 또는 정착 이후 발생한 것들이다.

송 경위는 “탈북 과정에서 인신매매, 강제혼인 등을 겪고 가까스로 한국에 정착한 여성들을 폭력 가정에 방치하는 것은 그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며 “가정 문제지만 공권력이 적극 개입해 남편을 격리하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현재 쉼터에서 생활하는 김 씨는 “사람답게 살고 싶어 탈출했지만 지난 12년은 지옥 같았다”면서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남편 때문에 불안하기도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새 삶을 시작하고 싶다”고 밝혔다.

김수연 기자 sy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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