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선 동쪽 끝은 강원 고성이고 서쪽 끝은 인천 강화다. 휴전선 155마일(약 250km)의 대부분은 육군이 지킨다. 육군이 방어하는 철책선의 서쪽 끝은 경기 파주다. 서해로 이어지는 파주 서쪽 한강 하류는 중립구역이다. 군사분계선을 둘러싼 육지의 비무장지대처럼 이 지역에서는 남북한 상호 접근이 금지되고 강변을 따라 철책선이 쳐져 있다. 육상의 휴전선이 강안(江岸)으로 연장된 것이다. 경기 김포와 강화에 걸친 강안 휴전선은 베트남전쟁에서 맹활약한 청룡부대의 후신인 해병대 2사단이 경비한다.
김포 전류리 포구는 한강 하구에서 민간인이 조업할 수 있는 마지막 포구다. 등록된 어선은 27척인데, 취재진이 찾은 8월 19일엔 작은 배 한 척만이 조업 중이었다. 이곳엔 예로부터 숭어와 황복이 많이 잡힌다. 탄탄한 철책이 포구를 에워싸고 있다. 2층으로 된 초소에 오르자 강 건너 왼쪽 산기슭에 오두산전망대가 솟아 있다. 정면엔 통일동산, 그 뒤로 멀리 출판단지가 어른거린다. 김덕환 상병은 “초소를 지키는 게 갑갑하지 않느냐”고 묻자 “만족하지만 좀 더 강한 훈련을 받고 싶다”며 ‘해병본색’을 드러냈다.
군용차를 타고 강을 따라 일직선으로 뻗은 철책도로를 달렸다. 길가에서 뛰놀던 고라니가 화들짝 놀라 달아난다. 들판은 연둣빛 벼로 꽉 차 있고, 강가엔 왜가리가 날아다닌다. # 연화봉 OP와 애기봉전망대
김포반도의 동북단에 위치한 돌고지 초소에 들렀다. 맞은편 북한군 초소까지 거리는 1.8km에 지나지 않는다. 맑은 날엔 강 너머 북한군의 움직임을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을 정도다. 물이 빠져 개펄이 드러나는 간조 때는 거리가 절반으로 줄어든다.
소초 상황실에선 폐쇄회로(CC)TV로 북한 지역을 정밀 감시한다. ‘Remember(기억하라) 326!’ ‘Retaliation(보복) 1123’이라는 구호가 눈길을 잡아끈다. 326은 천안함 편명이고, 1123은 연평도 포격도발 사건이 일어난 11월 23일을 뜻한다.
이어 꾸불꾸불한 산길을 달려 연화봉 OP(Observation Post·관측소)에 도착했다. 취재에 동행한 사단 정훈공보실장 이윤세 중령이 들려준 설화에 따르면, 연화봉엔 가슴 아픈 사랑 얘기가 깃들어 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치려고 이 지역에 수군을 보냈을 때 일이다. 고구려 병사와 백제 처녀 사이에 사랑이 싹텄다. 전투가 끝난 뒤 고구려 병사는 돌아갔고 그를 기다리다 지친 백제 처녀는 연못에 몸을 던졌다. 처녀는 죽은 후 연꽃으로 환생했다. 그래서 연화봉(蓮花峰)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점심식사 후 상륙장갑차대대에 들렀다. 국군의 날 시가행진에 참가할 장갑차 20대가 기동훈련 중이다. 하나같이 건장한 병사들의 구릿빛 피부가 믿음직스럽다.
오후 일정의 첫 방문지는 애기봉(愛妓峰)전망대. 김포시 월곶면 조강리에 위치한 이 전망대에서는 강 건너 북한 개성시 판문군 조강리 일대를 훤히 볼 수 있다. 파주 서쪽에서 임진강과 합류한 한강은 애기봉 앞을 지나 강화도 북쪽으로 흘러 서해로 나아간다. 애기봉 앞쪽으로 흐르는 한강을 조강(祖江)이라고 한다. 1989년 북한 병사 3명이 조강을 넘어 귀순했다.
# 초병 눈앞에 펼져진 북한 땅
애기봉 왼쪽으로는 염하수로(鹽河水路)를 사이에 두고 강화도가 보인다. 염하수로는 강화해협이라고도 한다. 염하수로가 시작하는 지점에 유도(留島)라는 조그만 섬이 있다. 선조들이 뱃길로 한양을 오갈 때 피곤한 몸을 잠시 쉬었다는 곳이다. 1997년 1월 해병 2사단은 전해 8월 대홍수 때 북한에서 떠내려 와 이곳에서 신음하던 소를 구조했다. 김포시는 이 소를 ‘평화의 소’라고 명명했다.
애기봉 유래도 흥미롭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평양감사는 애첩인 ‘애기’를 데리고 한양을 향해 피난길에 올랐다. 그런데 조강에 이르렀을 때 감사는 적에게 붙잡히고 애기만 가까스로 강을 건너 이 지역에 살게 됐다. 애기는 매일같이 언덕에 올라 감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 병들어 죽었는데, 죽기 전 “임 계신 북녘땅이 잘 보이는 이 봉우리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조강리 사람들이 애기 시신을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
애기봉 OP에 들러 CCTV로 북한 지역을 관찰했다. 선전용 마을의 공동주택은 외벽에 페인트칠을 하지 않아 생경한 느낌을 준다. 지붕이 얇은 기와인 벽돌집이다. 러닝셔츠 차림인 북한군 초병이 소변을 보는 모습이 포착됐다. 또 다른 병사는 초소 옆 그늘진 곳에서 비스듬히 누워 있다. 주민 몇 명이 밭에서 삽질과 곡괭이질을 한다. 아이들이 어기적거리는 모습도 카메라에 잡힌다. 공회당에는 ‘선군조선의 태양 김정은 장군 만세!’라는 구호가 내걸렸다. 좁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완연히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가슴 한편이 답답하다.
전망대 아래에 애기봉중대가 있다. 철책 경계가 주 임무인 이 부대 장병은 밤늦게까지 근무하고 오전 내내 취침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외출이나 외박이 쉽지 않을뿐더러 별 의미도 없다. 병사들의 낙은 오로지 포상휴가다. 매주 토·일요일 분대별로 농구와 족구 경기가 열리는데 우승팀은 2박3일 특별휴가를 받는다. 2011년 부임한 중대장 정현식 대위는 “운동경기를 통해 사기를 올리고 자칫 흐트러지기 쉬운 근무기강을 바로잡는다”고 말했다. 힘든 일을 묻자 “부하들을 처벌할 때가 가장 난처하다”고 털어놓았다. 기골이 장대한 정 대위는 “어릴 적 꿈이 장군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때문에 힘든 줄 모르겠다”고 호기로운 모습을 보였다.
생활관엔 냉난방 시설이 갖춰져 있다. 침상은 단층 침대다. TV는 각 침실에서 시청이 가능한 육군 GOP(일반 전방초소)부대와 달리, 식당과 휴게실에서만 볼 수 있다. 복도에 농구와 족구 대진표가 붙었다. 감사나눔 게시판엔 병사들이 올린 글이 빼곡히 적혀 있다.
오후 3시 철책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파란 하늘에 뽀송뽀송한 구름이 걸려 있고 강물 위로 백로가 날아다닌다. 2중 철책 사이에 있는 순찰로의 바닥은 콘크리트이고 내륙 쪽으로는 수풀이 무성하다. 초병 서현수 상병은 “북한 땅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게 될 줄 상상하지 못했다”며 “한반도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고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서 상병은 “북한군은 힘이 없어 보인다. 툭하면 누워 있거나 잔다. 점차 무너지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강 건너 북한 선전마을엔 밤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북한 병사들이 겨울에 모닥불을 피우는 광경도 목격했다고 한다.
“더 강해지고 싶어 해병대에 자원했다”는 박상학 일병은 “입대 후 해병대에 대한 자부심이 더 커졌다”고 말했다. 이곳에 배치된 지 닷새밖에 안 됐다는 그는 신병답지 않게 다부진 표정으로 통일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남측이 주도해 양측 합의로 통일이 이뤄지면 좋겠다. 우리가 경계근무를 잘 서고 국민이 안보태세를 잘 유지하면 통일을 말할 시기가 곧 올 거라 믿는다.” # 경계등 불빛에 젖어 촉촉한 강물
철조망에 참새 떼가 엉겨 붙어 노닥거린다. 잠자리가 떼 지어 날아다니고 말매미 소리가 우렁차다. 강물 위에서 평화롭게 쉬던 물오리들이 낯선 침입자의 기척에 놀라 일제히 날아오른다. 그들에겐 남과 북의 경계선이 없다. 희귀 조류의 보고인 이곳에선 재두루미, 민물가마우지, 쇠기러기 떼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고 한다.
동쪽으로 신리초소까지 걸은 후 시내로 나가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다음 야간 경계근무를 취재하려고 신리초소로 되돌아왔다. 7시 20분. 달걀 노른자위 모양의 낙조가 강 너머로 꼴깍 넘어갔다. 어느덧 반대편 하늘엔 희멀건 달이 걸렸다.
야간 경계근무 투입조가 정렬했다. 총기를 점검하고 암구호를 복창한다. 다들 체격이 크고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두 조로 나뉜 이들은 좌우측으로 갈라졌다. 경계 보조견 셰퍼드와 셰퍼드를 추종하는 잡종개가 강중거리며 뒤를 따랐다. 취재진은 서쪽 강화도 방면으로 향하는 초병들을 따라나섰다. 낙조 후 하늘은 연분홍 구름으로 화장한 상태다. 마치 파스텔로 쓱쓱 문질러놓은 듯 색감이 연하고 곱다.
달밤. 강물은 어둠 속에서 찰랑대고 수풀은 바람에 살랑거린다. 매미소리와 새소리는 낮보다 커졌다. 저벅저벅 병사들의 군홧발 소리가 육중하다. 하늘엔 별이 총총하다. 흥미롭게도 셰퍼드는 군인들을 따라 2중 철책 사이로 걷고 덩치가 작은 잡종개는 철조망 바깥 수풀길로 졸졸 따라온다. 병사들에게 물어보니 매번 그런 식이라고 한다.
8시가 넘자 철책을 따라 일정 간격으로 설치된 야간 경계등이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켜진다. 경계등은 발광다이오드(LED)등과 나트륨등 두 종류다. LED등은 은빛을, 나트륨등은 주황빛을 뿜어낸다. 낮에 햇빛을 받아 반짝이던 강물은 이제 불빛에 젖어 촉촉하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지만 ‘아름답다’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해병 2사단이 관할하는 철책 길이는 자그마치 80km에 달한다. 육군 1개 사단이 경비하는 구간의 몇 배를 방어하는 셈이다. 멀리 자유로의 불빛이 가물가물 손짓하는데 강 건너 북쪽은 칠흑처럼 어둡다. 남북을 경계 짓는 강물을 바라보며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미래를 생각해본다. 한편으로는 강물처럼 흘러간 유년기를 떠올리며.
# 100배, 1000배 응징 준비 완료
9시. 김포공항에서 이륙한 비행기가 별처럼 반짝거린다. 초소 근무병과 함께 북극성을 찾아본다.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 동북쪽으로 W 모양의 카시오페이아자리가 있고 그 중간에 작은곰자리인 북극성이 빛난다.
그다음 날 오전 9시 강화대교를 건너 연미정(燕尾亭)으로 갔다. 강화읍 월곶리에 위치한 연미정은 정묘호란 당시 조선이 청나라와 강화조약을 맺은 장소로 알려졌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해 한 줄기는 서해로, 한 줄기는 염화수로로 흐르는데 그 모양이 제비꼬리 같다고 해서 이곳에 지어진 정자를 연미정이라고 불렀다. 예전에 서해 쪽에서 들어오는 배들은 연미정 아래서 만조(滿潮)를 기다렸다가 서울로 올라갔다고 한다.
연미정은 월곶돈대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돈대(墩臺)는 조선시대 군사 주둔진지로, 오늘날의 소대 격이다. 돈대보다 큰 것이 중대 규모의 보(堡)이고, 그보다 큰 진(鎭)은 대대에 해당한다. 현재 강화도에는 5진 7보 53돈대가 남았다. 대부분 조선 숙종 때 해안경비를 강화하려고 설치하거나 보강한 것이다.
김포에 애기봉전망대가 있다면 강화엔 강화평화전망대가 있다. 4층짜리인 이 전망대에 오르면 북쪽에서 S자로 돌아 나오는 예성강 자락을 볼 수 있다. 또한 북한 쌀의 20%를 생산한다는 연백평야가 코앞이다. 그 뒤로 미라산과 송악산이 보인다. 전망대 4층은 군부대 관측소다. 이곳에 설치된 CCTV로 북쪽을 살펴보니 북한군 차량 이동과 철책을 보수공사하는 모습이 보인다.
11시 40분, 강화도 서북단에 있는 인화리중대본부(인화중본)를 찾았다. 2008년 8월 북한 주민 한 명이 스티로폼을 타고 도강(渡江)해 이쪽으로 귀순한 적이 있다. 인화리는 강화도 철책구간의 끝 지점이다. 철책이 쳐지기 전엔 밤에 몰래 낚시하는 주민도 있었다고 한다.
중대장 심우혁 대위의 안내로 강안 초소에 들러 병사들과 얘기를 나눴다. 인터뷰를 자청한 최세혁 상병은 “북한은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도발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해병대는 100배, 1000배 응징할 준비가 돼 있다”고 당차게 말했다. 통일에 대해선 “급격한 통일은 경제적 혼란을 빚을 테니 서로 맞춰가면서 천천히 이루는 게 좋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 국력의 기본은 안보
양사면 철산리 이장을 인터뷰한 후 내가면 외포리로 넘어갔다. 강화도는 유인도 9개와 무인도 7개로 이뤄져 있다. 강화도 서쪽 외포리에는 이 섬들을 오가는 여객선 선착장이 있다. 오후 3시쯤 외포리기동대를 찾았다. 해병 대위가 지휘하는 외포리기동대는 3개 제대로 구성됐다. 2개 제대는 해군에서 파견된 병력이고 1개 제대는 해병 2사단 5연대 직할 병력이다. 기동대 임무는 해상경비 및 인근 도서 작전지원이다. YPK, HPB, RIB 등 경무장을 한 지원함정을 갖췄다.
외포리에서 나와 내륙을 가로질러 강화도 동쪽 하단에 있는 초지진을 둘러봤다. 조선 숙종 때 구축한 초지진은 숱한 외침의 상처가 남아 있는 격전지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 함정이,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정이, 1875년 운양호 사건 때는 일본 함정이 이곳에 대포를 쏴댔다. 외국 함정들이 이곳을 공략한 이유는 강화도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뱃길이었기 때문이다. 수령 300년이 넘는 노송과 성벽에 남은 포탄 자국이 약소국 조선의 아픔을 전한다. ‘국력의 기본은 안보’라는 지상명제가 새삼 뼈저리게 다가온다.
그다음 날 아침 7시 반 일찌감치 숙소를 나서 외포리선착장으로 향했다. 말도행 여객선을 타기 위해서였다. 말도는 강화도를 이루는 섬 가운데 최서단에 위치한 섬이다. 말도에 가려면 외포리에서 출항한 배를 타고 주문도에서 내려 행정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마지막 취재지로 말도를 택한 것은 상징성 때문이다. 말도엔 한강 하구 중립지역에서 해병 2사단이 지키는 마지막 초소가 있다. 또한 서해 NLL(북방한계선) 기점인 우도에 근접한 섬으로, 육상 경계선이 해상 경계선으로 바뀌는 길목에 있다.
오전 10시 여객선이 출항했다. 선실은 인근 섬들로 가는 승객으로 꽉 찼다. 이 배는 차량도 실어 나른다. 앞 갑판에 차량이 빼곡하다. 주둔지로 향하는 해병대원들도 눈에 띈다. 동행한 정훈공보실장은 말도 초소를 지키는 병사들에게 선물할 초코파이와 과자 등을 한 상자 가득 실었다. 느릿느릿 나아가는 배 뒤편으로 물거품이 일면서 새하얀 항적(航跡)이 생겨난다. 갈매기 떼가 꽥꽥거리며 쫓아온다. 몇몇 승객이 새우깡을 던져주자 쏜살같이 채간다. 심지어 손에 쥔 새우깡을 낚아채는 놈들도 있다.
볼음도와 아차도를 거쳐 주문도에 도착하니 10시 40분이다. 여기서 여객선은 회항한다. 말도행 행정선으로 옮겨 탄 승객은 취재진 일행과 해병대원 10여 명밖에 없다. 다시 40분을 달려 말도선착장에 도착했다. 포구 특유의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개펄이 수백m에 걸쳐 뻗어 있고 해안 곳곳에 돌무더기가 있다.
# 말도의 해병대 마지막 초소
말도는 면적 1.45㎡에 지나지 않은 자그마한 섬이지만, 조선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이자 서해와 한강을 잇는 뱃길의 주요 길목이었다. 현재 주민은 12가구 13명. 가게가 없기 때문에 생필품과 식료품은 육지로 나가 구해 와야 한다. 일주일에 세 차례 들르는 행정선이 육지와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선착장에서 군용차로 옮겨 타고 15분쯤 언덕길을 오르자 말도 소초가 나타난다. 이곳에 주둔하는 해병은 40여 명. 녹음기(綠陰期)엔 병력을 증원한다. 소초장 윤종현 중위와 함께 초소를 둘러봤다. 초소 아래에 철조망이 쳐져 있다. 주둔지 방어용이다. 조수 간만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개펄이 바다 한가운데까지 진출해 있다. 바다 건너 정면에서 왼쪽으로 기다랗게 뻗은 지형은 북한의 연백염전으로 말도에서 8km 떨어졌다. 연백염전은 종종 귀순 통로로 이용된다. 간조 때 3km만 헤엄치면 걸어서 말도까지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오른쪽 동북 방면으로는 서검도가 보이고 그 뒤로 교동도가 있다. 서남쪽으로는 연평도에 인접한 우도가 있다.
입대한 지 6개월째인 김욱 일병은 “초병의 눈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어 영광”이라며 자연과 가까워지는 것을 섬 근무의 매력으로 꼽았다.
“도시에서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신선한 공기가 있다. 밤에는 반딧불과 별똥별을 실컷 볼 수 있다.”
김 일병은 “초소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같은 땅이지만 다른 나라라는 사실이 실감난다”며 “하루빨리 평화통일이 이뤄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말도에 머무른 시간은 채 한 시간이 안 됐다. 하지만 격오지 부대 장병의 노고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휴가를 떠나는 장병 몇 명이 말도를 떠나는 배에 함께 올랐다. 그들의 들뜬 표정이 보기 좋았다. 갑판에서 병사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3개월간 진행한 휴전선 취재의 대장정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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