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자하문로를 따라가다가 수성동 계곡으로 향하는 골목 쪽으로 방향을 틀면 한동안 이 동네 주민들이 ‘서촌 비밀의 정원’이라고 부르던 집이 나온다. 옥인동 168-2 서까래가 있는 한식 지붕과 빨간 벽돌이 멋스럽게 조화된 2층 주택의 대문 문패에는 ‘박노수’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올해 2월 세상을 떠난 한국화가 남정(藍丁) 박노수 화백(1927∼2013·사진)이 1973년부터 2011년 말까지 살았던 가옥이다.
종로구는 11일 이 집을 종로구 첫 구립미술관인 ‘박노수 미술관’으로 개관했다. 11일 기자가 찾은 가옥은 건물 곳곳에 역사가 깃들어 있었다. 건물은 조선 후기 친일파 윤덕영이 딸을 위해 1938년 지은 것으로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시 문화재자료 1호로 등록된 곳이다. 현관 위 ‘여의륜(如意輪)’이라고 쓰인 낡고 오래된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작품이다. ‘이 집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만사가 뜻대로 잘된다’는 뜻이다. 진한 고동색 마루와 벽난로가 있는 1층 응접실과 거실, 2층 다락방 맞은편 화실에 ‘달과 소년’, ‘류하(柳下)’ 등 작품이 집과 조화를 이루며 자연스럽게 전시돼 금방이라도 화백이 손님들을 반기며 나올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 미술관은 박 화백과 유족들이 2011년 11월 종로구에 기증한 가옥과 정원, 소장해온 고미술과 골동품, 고가구, 수석 등 1000여 점을 바탕으로 설립됐다. 종로구는 구청에 수장고를 만들어 작품을 보관하고 있으며 미술을 전공한 학예사인 박 화백의 막내딸 이선 씨를 전담 학예사로 채용했다. 미술관 개관에 맞춰 시작된 개관 전시 ‘달과 소년’전은 올해 12월 25일까지 열린다. 박 학예사는 “아버지의 작품을 여러 사람에게 전시할 수 있게 돼 큰 영광”이라며 “달과 소년은 화백의 순수한 예술가의 혼을 상징하는 따뜻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박 화백이 희귀한 수석과 석등, 모란과 감나무 등 여러 나무를 배치해 꾸민 작은 정원도 큰 볼거리다.
종로구 일대에는 박노수 미술관 외에도 예술가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근대 가옥이 여러 곳 있다. 청전 이상범 화백(1897∼1972)이 43년 동안 거주한 이상범 가옥과 화실은 누하동 181에 있다. 이 화백이 사망하기 전까지 작품 활동을 했던 곳으로 청전화숙(靑田畵塾)이라고도 불린다. 1930년대 만들어진 근대 가옥으로 가옥은 항상 개방한다.
원서동 16에는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 화백(1886∼1965)의 가옥이 보존돼 있다. 고 화백의 가옥에서는 한 해 두 차례 기획 전시회가 열린다. 올해 두 번째 전시는 9월 30일 시작된다.
시인이자 소설가 이상이 살았던 통인동 154-10 집터에는 김수근 문화재단과 문화유산 보존 활동을 펼치는 재단법인 아름지기가 지난해 10월 카페 ‘제비다방’을 열었다. 이상이 1933년 종로1가에 문을 열었던 다방 ‘제비’는 당대 예술가들이 모인 아지트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지붕과 난방 시설을 보수 중인 ‘제비다방’은 올해 10월 다시 문을 연다. 종로구는 윤동주 시인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해 3월 인왕산 자락에 버려진 청운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개조해 윤동주 기념관을 열었다. 시인은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후배 정병욱과 종로구 누상동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을 하며 종로와 인연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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