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업자 상대로 13차례 도박판… 5억7000만원 챙긴 5명 구속
주범은 “국내 5명안에 드는 타짜”
“회장님, 자주 뵙는데 언제 한번 골프나 같이 치러 가시죠?”
올해 초 서울 강남구의 한 유명 호텔 헬스클럽. 무역업자 김모 씨(57)에게 낯익은 얼굴이 말을 걸어왔다. 수년 동안 같은 헬스클럽을 다니며 샤워장에서도 자주 봤던 박모 씨(59)였다. 연회비만 1억 원이 넘는 고급 헬스클럽에서 회원끼리는 무조건 ‘회장님’으로 통했다. 박 씨는 자신을 건강식품 제조업체 회장이라고 소개했다. 김 씨는 박 씨의 손에 끌려 한정식 식당을 다니고 골프도 함께 쳤다. 프랑스 명품 지갑도 선물 받고 골프장에서 미모의 40대 여인을 소개받기도 했다. 김 씨는 그게 ‘타짜’들이 깔아놓은 판인지는 꿈에도 몰랐다.
올해 1월 초 김 씨는 박 씨와의 내기 골프에서 연신 돈을 땄다. 박 씨는 억울한 체하며 “카드나 한번 치자”고 김 씨를 이끌었다. 김 씨는 강남구 한정식집 2층 룸에서 박 씨 일행과 함께 판돈을 걸고 ‘훌라’ 도박을 했다. 박 씨 일당의 말솜씨와 스릴 넘치는 분위기에 김 씨는 점차 도박판에 매료돼갔다. 이날 김 씨는 300만 원을 잃었다.
김 씨는 그때부터 한정식집과 고급 레스토랑을 전전하며 박 씨의 도박판에 끼었다. 처음에는 판당 수백만 원으로 시작했지만 점차 수천만 원 단위로 커지더니 급기야 1억 원에 가까운 돈을 잃기도 했다. 6월 7일 김 씨는 경기 가평에 있는 자신의 별장으로 박 씨 일당을 데려와 ‘하이로’와 같은 도박을 했다. 김 씨는 1억7000만 원까지 판돈을 올렸지만 번번이 졌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김 씨는 9월 초 별장 천장에 폐쇄회로(CC)TV를 몰래 설치했다. 9월 3일과 4일 도박을 하고 박 씨 일당이 돌아간 후 녹화 장면을 돌려 본 김 씨는 경악했다. 김 씨가 일어서서 식탁 뒤편의 블라인드를 올리는 짧은 순간에 박 씨가 맞은편 사람에게 입 모양으로 신호를 보냈다. 위에 있는 카드를 주는 척하면서 아래의 카드를 주는 ‘밑장빼기’나 미리 패를 조작해 같은 편에게 높은 패가 돌아가도록 하는 ‘탄작업’도 이뤄졌다. 김 씨는 이런 식으로 13차례에 걸쳐 5억7000여만 원을 도박판에서 잃고 ‘타짜’들이 말하는 ‘죽새’(사기도박 대상)가 된 것이다.
서울 송파경찰서는 사기 혐의로 박 씨 등 5명을 구속했다고 30일 밝혔다. 이들은 카드 뒷면에 자신들만 의미를 알 수 있도록 음영 처리를 한 ‘목(目)카드’ 등 장치도 동원했다. 일당 가운데 각종 조작을 담당한 ‘기술자’ 배모 씨(54)는 경찰 조사에서 “‘타짜’라는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 나는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타짜 중 하나”라고 말했다. 그는 60평형대 고급 아파트에 살며 포르셰, 벤츠 등 고급 자동차를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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