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많지만 제가 10년 주기로 사는 곳을 옮긴 점을 감안해 볼 때 몇 년 후 이곳을 떠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가뜩이나 인력이 부족한데 어딜 도망가려고. 안 돼.”
서울에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강릉을 거친 다음 국도 7호선을 1시간 반 더 달려 도착한 곳, 경북 울진군 죽변면 해안가다. 여기서 만난 남자 3명은 어쩌다 이런 ‘깡촌’까지 오게 됐느냐는 물음에 천연덕스럽게 농담을 주고받았다. 검게 그을린 얼굴과 팔이 꼭 어선에서 일하는 ‘뱃사람’ 같았다.
파도와 너울을 헤치며
지난해 3월. 바다의 너울이 생각보다 심했지만 하던 일을 빨리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배를 띄웠다. 인력이 부족해 아르바이트 학생을 고용해 함께 승선했다. 이들이 동해안 연안을 돌 때 타는 배는 35t급. 비교적 규모가 큰 배였지만 변덕이 심한 동해가 그냥 봐줄 리 없다. 무게가 1t 가까이 되는 설비를 바닷속으로 넣었다가 빼는 작업을 했다. 함께 승선한 아르바이트생과 함께 장비를 끌어올리던 중 큰 너울이 갑자기 몰아쳤다. 배가 휘청거린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 “악∼” 하는 비명과 함께 아르바이트생이 쓰러졌다. 배가 휘청하면서 1t 무게의 장비가 날아와 손가락에 부딪힌 것이다. 다행히 손가락을 잃지는 않았지만 바다에서 하는 작업이 위험하다는 경각심을 일깨워준 사건이었다.
대화가 이어졌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죠.”
“좁은 배에서 생활하는 건 모두 이골이 났죠. 배에서 새우잠 자며 24시간 작업하는 것도 익숙해요.”
“그래도 바다에 나간 지 30분 만에 몸을 못 가눌 정도로 뱃멀미가 심한 사람도 있어요. 다른 사람이 대신 일을 해줄 수 없기 때문에 그야말로 ‘울며 겨자 먹기’로 배를 탑니다.”
그랬다. 이들은 배를 타야만 하는 뱃사람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들을 ‘박사’라고 부른다.
본적까지 바꾼 독도 사랑
김윤배(43) 노충환(47) 김영일 박사(45).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동해연구소에서 동해와 독도를 연구한다. 일본이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부르며 영토 분쟁을 일으킬 때 당위적인 분노를 표출하는 일반인과 달리 ‘냉철한 머리’로 대처한다.
김윤배 박사(동해특성연구부 선임기술원)의 인생 역정은 독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얼마 전 본적을 옮겼다. 전남 강진군에서 독도로.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34번지’가 이제 그의 본적이다. 그는 1990년대 PC통신 천리안에서 ‘독도사랑 동호회’ 초대 회장을 지내며 독도와 인연을 맺었다.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당시 동호회 부산모임 회장이던 아내를 만났다. 김 박사는 왜 이렇게 독도에 집착하게 됐을까.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지리산에 올랐다가 한 일본인을 만났다. 장터목산장에서 하루를 같이 보내게 된 일본인과 얘기하던 중 자연스럽게 독도 이야기가 나왔다. 그 일본인은 독도가 왜 일본 땅인지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 모습을 보고 김 박사는 충격을 받았다. 이후 그는 해양물리를 전공하며 동해와 독도 전문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독도의 중요성을 누구나 이야기하지만 스펙트럼이 너무 넓어요. 극좌부터 극우까지 정말 다양하죠. 하지만 정작 전문성은 없어요. 독도는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알고,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김 박사는 현재 동해 연안의 환경 변화, 표층 온도의 변화 등 동해의 해양 특성을 연구하고 있다. 조만간 완공되는 ‘울릉도독도해양연구기지’에 가족들과 함께 들어갈 예정이다. 그는 “러시아, 중국, 일본, 한국에 접해 있는 동해 중 우리가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영역은 8.5%에 지나지 않는다”며 “문제는 우리가 이 8.5%도 제대로 모른다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울릉도 호박엿, 너무 뻔해요”
물고기 전문가인 노충환 박사(동해특성연구부 책임연구원)는 지역 주민을 위한 연구를 하고 있다. 바로 어류 육종이다. 노 박사는 2008년 8월 동해연구소가 문을 연 뒤 그해 9월 4일 발령을 받았다.
그가 예전에 근무했던 해양과학기술원 안산 본원에서 어류 육종을 연구하는 건 쉽지 않았다. 물고기를 키울 수 있는 환경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동해연구소가 있는 울진은 달랐다. 연구소 옆 한울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온배수와 지하수, 동해 표층수 및 심층수를 한꺼번에 끌어다 쓸 수 있어 어류 육종 연구를 위한 최적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바닷물을 끌어와 원전 냉각수를 식히는 역할을 하는 원전 온배수는 바닷물보다 7도가량 높아 한겨울에도 수온이 15도를 유지한다. 동해 심해수는 바다 쪽으로 5km만 나가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얻어진 다양한 온도의 바닷물에서 어류를 키우며 질병에 강한 어종과 차가운 바닷물에서도 양식할 수 있는 난류성 어류의 유전자를 연구한다. 이를 통해 부가가치가 높은 어종을 찾으려는 것이다.
한울 원전을 운영하는 한국수력원자력과 울진군, 경북도를 상대로 설득에 나섰다. 2008년부터 한수원과 울진군을 설득하기 시작한 노 박사는 결국 올해 7월 원전 온배수 인입시설 건설 예산 20억 원을 확보했다.
“처음엔 많이 힘들었죠. 한울 원전 관계자와 2008년 12월 이야기를 할 때였습니다. 원전 온배수가 해양 생태계를 망가뜨릴 수 있다는 의견도 있는데 어떻게 원전 온배수가 어류 육종에 도움이 되느냐는 원전 관계자의 지적이 있었죠. 난감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지역을 위한 일이라는 논리로 설득했습니다. 휴가철 많은 사람이 동해안으로 와서 회를 먹지만 정작 횟감은 남해 쪽에서 올라옵니다. 하지만 어류 육종 연구를 통해 울진이 횟감을 댈 수 있다면 지역 경제에도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는 논리가 한수원 관계자와 현지 공무원의 생각을 바꿀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노 박사는 파도가 높고 수온이 낮아 양식이 힘든 울릉도 근해에 가두리 양식장을 설치하는 방안도 연구할 계획이다. “울릉도 관광객이 늘고 있는데 대부분 섬을 떠날 때 손에 오징어나 호박엿을 들고 있습니다. 너무 뻔하잖아요. 언젠가는 울릉도에 온 관광객들이 찬물에도 잘 사는 송어나 연어 등을 훈제한 가공식품을 특산물로 들고 가는 날이 있게 할 겁니다.”
“커피 전문점 없어도 행복해요”
“제 큰아이는 전체 학생 수가 25명밖에 안 되는 중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아이들의 공부가 뒤처지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큰애가 다니는 학교에선 이른바 ‘일진’을 만들려야 만들 수 없어요. ‘왕따’나 학교폭력과 같은 사회 문제에서 자유롭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곳에서 지내기에 어려움이 없느냐는 물음에 김영일 박사(동해특성연구부장)가 한 대답이다. 경북 북부 해안지역인 울진은 가족이 함께 지내기에 불편한 것이 많다. 서울에는 흔한 ‘스타벅스’는 물론이고 멀티플렉스 영화관도 반경 수십 km 내에서 찾기 어렵다.
동해연구소에서 함께 일할 연구인력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울진에서 그리 멀지 않은 포스텍에서 공부한 한 젊은 연구자가 최근 동해연구소에서 일하고 싶어 몇 차례 문의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동해연구소가 부산으로 이전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해준 뒤 연락이 끊겼다. 해양과학기술원은 2015년 부산으로 이전하지만 동해연구소는 그대로 울진에 남을 예정이다.
정작 연구원들의 고민은 다른 데 있다. 일본의 우경화로 국제 공동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김영일 박사가 실상을 설명했다.
“일본에서는 지난해부터 동해 관련 연구 논문에 ‘Sea of Japan(일본해)’이라는 표기를 명기하지 않으면 논문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영문 명칭이 이렇게 나가는 국제 논문에 한국 연구자들이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일본 연구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연구자들은 솔직히 말해 영토 분쟁보다는 동해라는 연구 대상 전체를 바라보며 접근하지만 정치적인 이유가 공동연구 노력에 찬물을 끼얹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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