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여성시대]<1>남자들이 말하는 ‘사무실의 그녀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7일 03시 00분


職女여, 약자 콤플렉스를 차버려라
■ 신 여성시대 시리즈를 시작하며

《 여성 대통령을 배출한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서 보기엔 명실상부한 여성 주도 사회로 보이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한국 여성들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학진학률이 세계 최고일 정도로 전 세계에서 가장 고등교육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졸 여성 고용률은 60.1%대로 OECD 평균 78.8%에 크게 못 미치고 있고 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 여성들이 ‘고위직’으로 진출하는 비율도 아직 미미합니다.

본보는 ‘신 여성시대’ 기획을 통해 한국 사회 여성들의 현주소를 짚어보려 합니다. 직장 여성들은 물론이고 전업주부들의 고민까지 함께 담고 여성들의 목소리만이 아니라 남성들의 목소리도 아우르려 합니다. 시리즈는 ‘직장 편’ ‘전문직 여성 편’ ‘청소년 성 평등의식조사 편’ ‘전업주부 편’을 포함해 미국 스웨덴 등 선진국 여성들의 모습까지 소개할 예정입니다.

여성 주도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해서 여성들만 잘 사는 사회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남자들과 더불어 잘 사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1부 ‘직장 편’은 요즘 직장 여성들의 모습을 담아보았습니다. 직장 여성이 늘어나면서 직장 내 남녀 간 소통의 문제가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내놓고 말하지 못했던 여성 동료와 상사들을 향한 남성들의 ‘불만’의 목소리를 들어보았습니다. 》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직장 내에서 여성 동료, 후배, 상사와의 관계 때문에 고민하는 남자들도 늘고 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란 말처럼 같은 것을 놓고도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이 달라 소통에 어려움이 있다는 호소다. 일부 남성들 중에는 “솔직히 여자랑은 정말 같이 일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다. 하지만 직장 내 남녀 간의 의사소통 문제는 일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다. 자, 남자들은 여자 동료, 선후배, 상사와의 어떤 점을 힘들어할까.

○ “너, 나 욕했다며?”


대기업에 근무하는 A(37)는 최근 낯 뜨거운 경험을 한 뒤 여자 동료들과 말할 때는 절대 속을 털어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사내 술자리에서 무심결에 한 여자 동료 험담을 했는데 얼마 후 당사자가 찾아와 “너, 나 욕했다며?” 하고 따진 것이다. 곰곰 짚어 보니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여직원 하나가 당사자와 ‘절친(절친한 친구)’이었다.

A는 “나 역시 술자리에서 남녀를 가리지 않고 상사나 후배, 동료 험담을 했지만 내 경험상 거의 대부분 남자들은 험담을 들어도 당사자에게 이를 전하지는 않는다. 물론 남자들도 입이 ‘싼’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동안 경험상 여자들이 아무래도 남자들보다는 입이 좀 가벼운 면이 있다. 따라서 사내(社內) 비밀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나 큰일을 도모할 때 여자들에게는 좀 더 신중하게 속을 터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남자 직장인들이 겪는 또 다른 고충은 상사, 동료, 후배를 가리지 않고 여자들과 문제가 날 경우 “여자 하나 다루지 못하는 못난 놈”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B(36)는 최근 지시를 잘 따르지 않는 팀 내 여직원과 심한 마찰을 빚었다. 이 여직원은 다음 날 직속상사인 B에게는 말도 없이 B의 상사에게만 말하고 휴가를 가 버렸다. 황당해하는 B에게 돌아온 평판은 ‘부하직원 관리 능력 없는 상사’라는 딱지였다.

B는 “나도 남자지만 남자들에게는 ‘여자는 이리저리 달래고 오냐오냐하며 끌고 가야 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있다”며 “내가 남편이나 오빠도 아닌데 직장에서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고 했다.

▼ “꽁꽁 감춰놨다 뒤끝 작렬… 금성女, 같이 일하기 불편해” ▼

또 다른 대기업 직원 C는 “여자 상사를 모시는 남자 부하들의 경우 여자 상사가 짜증을 내거나 신경질을 부릴 경우 남자 동료들에게서 ‘거 좀 잘 달래주지 왜 그래?’라고 듣는 경우가 많다. 기본적으로 위아래를 따지지 않고 여자 동료를 ‘배려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조직 내 상당수 남성들에게 여자 동료의 문제는 해당 여성의 문제라기보다 이를 어르고 달래지 못하는 ‘남자의 관리 능력 부재’로 인식되는 면이 강하다”고 전했다.

○ “여자라고 무시하는 거야?”

남자 직장인들은 여자들이 그동안 약자로서 당해 온 ‘희생자 콤플렉스’가 있어서 소통이 어려울 때가 있다고 토로한다. 무조건 ‘여자라고 무시한다’고 몰아세운다는 것이다.

대형 보험회사 지점 부장인 D(50)는 여섯 살 아래인 여자 지점장 E를 모시고 있다. D는 입사 때부터 지점을 돌며 산전수전 다 겪은 이른바 ‘밑바닥’ 출신. 그러나 공채 출신인 E 상사는 본사에 있다가 경력 관리 차원에서 잠시 들른 경우였다. 그런데 이 E가 온 뒤부터 실적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거래처 사장, 지역 유지 등이 여자 지점장을 상대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 영업 특성상 골프도 치고, 술자리도 해야 하는데 여 지점장은 “그건 내 일이 아니다”라며 거절한 것. 이 때문에 소위 ‘접대’는 D가 도맡았지만 지점장도 아닌 그의 직급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참다못한 D가 어느 날 상사 E에게 회식 중에 “자꾸 이런 식으로는 곤란하다”고 하자 E는 “지금 내가 여자라고 무시하는 거냐?”며 버럭 화를 냈다.

20년 경력의 한 대기업 여성 임원도 “솔직히 드센 남자 직원들은 상대하고 싶지 않다. 남자 상사들에게는 절대 복종을 하면서 여자 상사에게는 뭘 지적하면 바로 공격이 들어와 ‘기어오른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여성관리자를 상사라는 직급으로 보지 않고 마치 ‘보호’해야 할 동생이나 누나 취급하면서 지시에 따르지 않는 경우도 많다. 나 역시 이왕이면 부드러운 남자 직원을 선호하는 이유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내가 너무 과민한 경우가 많지 않았나 생각도 된다. 내 안에 오랜 약자 콤플렉스가 있었음을 인정한다”고 고백했다.

서로 간에 소통방식의 차이도 있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F(32)는 최근 여자 과장에게 크게 야단을 맞았다. 이후 어색한 관계를 풀기 위해 술자리를 청했다가 오히려 화를 키웠다. 술을 따르며 “죄송합니다” 하자 과장이 “뭐가 죄송한데?”라고 반문한 것. F가 업무상 실수와 야단맞을 때의 태도 등을 주섬주섬 말하자 여자 과장은 “그것밖에 없어?”라고 다시 물었다. F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 없는 것 같은데 과장은 내가 대충 넘어가려고 한 것처럼 본 것 같다. 남자 상사와 일했을 때는 ‘죄송합니다’ 하면 ‘됐다. 술이나 마시자’ 하며 털고 갔다. 이번 경우처럼 뭘 잘못했는지 구체적으로 묻거나 대답하는 경우는 없었다”고 토로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여자들은 화를 참고 있다가 한꺼번에 표출하는 경우가 있다. 개인 차이가 있지만 여성은 관계지향적, 남성은 목표지향적인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들은 또 직설적으로 얘기하기보다 상대가 상처받을 것을 염려해 간접화법을 자주 쓴다. 직설화법에 익숙한 남성들이라면 여성들의 이중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손해 보지 않으려는 여자들

중견기업 마케팅 부서에서 일하는 G(38)는 지난해 말 어이없는 경험을 했다. 팀 업무 특성상 국내외 출장이 잦았는데 특정인에게 출장이 몰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순번제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여직원 H가 국내 출장 차례가 되었을 때에는 사정이 있어 비행기 타기 어렵다고 했다가 유럽 출장 순서에 돌연 “가겠다”고 한 것. G는 “물론 모든 여직원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여직원들은 궂은일이나 손해 보는 일은 안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하다못해 밥 사주는 일도 인색하고 심지어 부의금이나 축의금 내는 일에도 소극적”이라고 말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기획팀에서 일하는 I는 “여자 선배들 중에는 상사에게 하소연해 자기 일을 남들에게 나눠 주는 경우가 있다”며 “그래놓고 동료가 출장이나 휴가를 가서 대신 해야 할 일은 ‘내 일이 아니다’라며 하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언젠가는 동료들이 며칠째 날밤을 새우는데 자기는 할 일이 없다고 사무실에서 영어회화 공부를 하는 여자 선배도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남성들은 이성보다는 동성과 일하는 것을 더 편하게 느꼈다. 여성리더십연구원이 2012년 국내 최초로 10개 대기업 임직원 279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기업 여성관리자 양성을 위한 조직문화와 리더십 연구’ 설문조사에 따르면 “남자랑 일하는 게 더 편하다”는 문항에 남성은 71%가 “예스”라고 한 반면에 여성은 45%에 불과했다.

이 설문조사에서 남성들이 꼽은 여성들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은 ‘이기적이다’ ‘눈앞의 이익에 집착한다’ ‘실천력이 부족하다’ ‘시야가 좁다’ ‘숫자에 약하다’ ‘지각을 자주 한다’ 등이었다. 한 대기업 사원은 “솔직히 여자 상사들보다 남자 상사들이 사람들을 포용하는 면이 많다. 여자 상사들은 친한 사원하고만 밥이나 차를 먹는다든지, 친한 사람끼리만 어울리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설문조사에서 남성이 가장 적극적으로 공감을 나타낸 항목은 ‘여성이 남성보다 더 이기적’(57%)이라는 거였다.

이진구·구가인 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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