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선생께서는 생전에 제게 '부모형제와 맞바꾼 자유민주주의를 마음껏 향유하되 책임감을 갖고 살라. 헐벗고 굶주리는 북한 인민을 한시도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선생의 말씀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2010년 10월 10일 향년 87세로 세상을 떠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3주기에 맞춰 '소설 황장엽'(시대정신)을 낸 탈북작가 림일 씨(47). 그는 1997년 쿠웨이트 주재 조선무역대표부 직원으로 근무하다 한국으로 망명했고, 2011년에는 '소설 김정일'을 발표했다.
"제가 1997년 3월 26일 한국 땅을 밟았는데 선생은 저보다 한 달쯤 뒤에 한국에 오셨지요. 선생의 망명 소식을 공안당국의 안가에서 TV뉴스로 접하고는 '저런 거물마저 북한을 등지는 것을 보면 북한 체제가 오래 못 가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작가가 황 전 비서의 1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무렵이었다. "남과 북을 모두 체험한 지식인이자 학자, 정치인이었고, 북한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선생의 모습이 너무 쉽고 빨리 잊혀지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소설 상권은 북한 체제에 등을 돌린 황 전 비서가 한국으로 망명하는 1997년까지, 하권은 황 전 비서가 사망하는 2010년까지가 배경이다. 특히 상권은 황 전 비서가 탈북을 결심하기까지의 심경변화에 주력했다. "자신이 기틀을 세운 주체사상이 정권유지와 개인숭배의 도구로 전락하고, 나락에 몰린 인민들의 삶도 보살필 수 없는 상황에서 선생이 느끼셨을 무력감과 심적 동요를 떠올리며 썼습니다."
소설에는 황 전 비서의 인간적 면모가 엿보이는 대목도 적지 않다. 중국 베이징에서 한국대사관으로 망명할 기회를 엿보려고 백화점에 나선 황 전 비서가 과자와 사탕을 사다가 북에 두고 온 손녀를 떠올리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저 역시 평양에 아내와 두 살 난 딸을 두고 왔습니다. 딸은 살아있다면 이제 다 큰 처녀가 됐겠지요. 쿠웨이트에서 망명을 결심할 당시의 제 복잡한 심경을 소설 속 황 선생님께 투영시킨 대목입니다."
2년 가까운 집필 과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황 전 비서의 강의를 들으며 그의 생각과 말을 접할 기회가 이었지만 그를 소설의 주인공으로 살을 입혀나가는 작업은 별개의 일이었다. "선생께서 워낙 꼿꼿한 성정인데다 학자풍 지식인이라 소설로 형상화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글이 막힐 때면 선생의 회고록과 저서들을 읽으며 소설 속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지 계속 고민했습니다."
작가는 조만간 소설책을 들고 대전국립현충원에 있는 황 전 비서의 묘역을 찾을 계획이다. "묘소에 술 한 잔 따라 올리고, 제가 선생님의 생을 그린 소설을 썼다고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차기작은 인물 소설이 아닌 남북한의 통일과정을 그린 소설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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