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마의 편지’가 도착한 건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한국 교도소에서 10년 넘게 단련된 저도 태국 교도소에선 미치기 일보
직전입니다.” 영어로 쓴 편지에는 불만 사항이 장황하게 적혀 있었다. ‘말이 안 통해 매점에 거의 못 간다’ ‘어쩌다 가면 뒤에
늘어선 죄수들이 소리를 질러 늘 싸움 직전까지 간다’ ‘재소자들이 내 소지품에 마약을 찔러 넣고 교도관에게 신고해 괴롭힌다’….
현지 교도관이 우리말로 쓴 편지를 못 부치게 한 것에 대해선 ‘재소자가 모국어로 편지 쓸 권리는 전 세계 감옥의 상식’이라며
정부 차원의 항의를 요구했다. 태국 주재 한국대사관의 경찰 영사인 차경택 총경(51)은 편지를 읽다 헛웃음이 나왔다. 》
우리 경찰의 해외도피 흉악범 ‘1번 수배자(최우선 검거 대상)’ 최세용(47). 최세용은 차 총경을 ‘저승사자’라고 불렀다. 경찰청 인터폴이 체포한 최세용을 신속히 한국에 보내는 게 차 총경의 임무였다. 최세용은 지난해 성탄절 첫 편지 이후 차 총경에게 10여 통의 편지를 보냈다. 모두 상당한 수준의 영어로 쓴 편지였다. 편지에는 스스로 운명을 예견한 구절이 있었다. “한국에 가면 저는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겠죠.”
최세용은 2007년 7월 경기 안양시의 한 환전소에 들이닥쳐 현금 1억 원을 훔쳤다. 여직원(당시 25세)이 몰래 신고 벨을 누르자 칼로 목을 찔러 살해했다. 필리핀으로 도주한 뒤에는 2008∼2011년 한국인 관광객 13명을 납치했다. 필리핀 여행을 앞둔 한국인들에게 인터넷을 통해 “여행 가이드를 해주겠다”고 접근한 뒤 공항에 마중 나가 차에 태웠다. 납치한 뒤 석방비 명목으로 2억7000만 원을 뜯어냈다. 납치된 이들 중 홍석동 윤철완 씨는 여전히 실종 상태다. 홍 씨 아버지는 지난해 12월 31일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최세용이 ‘이역만리 감옥에 갇힌 자국민 인권’을 운운하며 차 총경에게 처음 편지를 보낸 지 일주일 만의 일이었다. ○ 아내 만나러 간 길이 ‘저승길’
지난해 7월 8일, 태국 경찰에서 넘겨받은 얼굴사진 40장 가운데 한 장이 차 총경의 눈에 들어왔다. 장발에 야윈 얼굴, 뿔테 안경. 수배전단과는 달랐지만 분명 ‘그놈’이었다. 2007년 필리핀으로 도주해 5년 동안 행적이 오리무중이었던 최세용.
당시 우리 경찰은 최세용이 2011년 가을 태국으로 도망갔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어 아내 시모 씨(45)가 2011년 12월 이후 세 차례 태국에 출입국한 기록을 확인했다. 시 씨는 석 달마다 태국 국경을 잠시 넘었다 들어오며 체류기간을 연장하고 있었다. 이른바 ‘비자런(Visa Run)’ 방식이었다.
최세용이 아내를 도피처로 불러 함께 살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했다. 차 영사가 받은 사진 40장은 시 씨가 지난해 5월 태국과 미얀마를 연결하는 치앙라이 국경을 다녀왔던 날 검문소를 통과한 한국인들의 얼굴이었다. 그중 최세용이 있었으니 악마의 꼬리를 찾은 셈이었다. 경찰은 아내 뒤를 밟아 그를 잡기로 했다.
시 씨가 다음 ‘비자런’을 할 것으로 예상된 지난해 8월 경찰청은 치앙라이 국경에 경찰관을 보냈다. 하지만 그땐 최세용 부부가 이미 2주 전 태국으로 입국한 후였다. 경찰은 국경관리소 측에 시 씨를 발견하면 바로 알려달라고 부탁했지만 그쪽에선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경찰은 치앙라이에 주재관을 보내 국경관리소 직원들에게 여러 번 식사와 술 대접을 했다. 그때부터 검문소 직원들은 책상 위에 최세용 부부의 사진과 수배 전단을 붙였다.
다시 석 달 뒤인 지난해 11월 3일 차 총경은 태국 이민국의 전화를 받았다.
“시○○가 나타났다.”
시 씨가 오전 10시경 검문소를 나갔다가 3시간 뒤 다시 입국해 이민국 직원 5명이 사복차림으로 시 씨를 쫓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날은 마침 한국 경찰관들이 최세용을 잡으러 방콕에 도착한 날이었다.
“미행만 하고 절대 체포하면 안 됩니다. 남편이랑 같이 있을 때 잡아야 합니다.”
차 총경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강조해서 말했다. 국경을 넘을 땐 가족을 먼저 보내 동태를 살핀 후 유유히 들어오는 게 해외도피범들의 수법이었다. 이민국 직원 2명은 시 씨가 탄 버스에 함께 탔고 3명은 승용차를 타고 버스를 뒤따랐다. 시 씨는 버스에서 내려 치앙라이 외곽의 한 커피숍에 들어갔다. 안으로 따라 들어가기 직전 이민국 직원의 전화벨이 울렸다. 차 총경이었다.
“최세용은 분명 다른 사람 이름을 댈 겁니다. 무조건 잡으세요.”
시 씨는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귀퉁이에 앉은 한 남자와 마주앉았다. 이민국 직원 2명은 커피숍 문 앞을 지키고 3명은 시 씨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갔다.
“여권 좀 봅시다.”
최세용은 태연한 얼굴로 ‘송OO’ 명의로 된 가짜 여권을 내밀었다. 필리핀에서 납치했던 한국인 관광객에게서 빼앗은 여권이었다. 최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이민국 직원들은 수배전단을 들이밀며 수갑을 채웠다. 5년 4개월의 도피 행각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현지 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최세용에겐 그날 밤 마지막 탈출 기회가 있었다. 최세용을 감시하던 태국 경찰관 중 한 명이 “풀어주면 돈을 얼마나 줄 수 있느냐”고 제안해온 것. 하지만 오랜 도피생활로 돈이 떨어진 최세용은 꼼수를 부리지 못했다.
태국 감옥에 수감된 최세용은 차 총경에게 아내를 돌봐달라는 부탁을 자주 했다. 그는 편지에서 “아내는 저 때문에 모든 걸 잃었습니다. 아내는 한 불쌍한 범죄인의 여인일 뿐입니다”라고 썼다. 하지만 최세용이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아내와의 관계가 아이러니하게도 경찰에 발목을 잡히는 단초가 됐다.
○ 한국 송환 직전 “옷 사 주세요”
최세용을 잡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를 한국에 데려오려면 험난한 여정이 남아있었다. 최세용이 태국 1심 법원에서 징역 9년 10개월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위조여권 사용과 공문서 허위 기재 등의 혐의였는데 예상외의 중형이었다.
우리와 태국의 범죄인 인도조약에 따르면 현지에서 형을 다 치른 범죄자만 인도가 가능했다. 최세용이 출소할 때까지 10년이 지나버리면 그의 죄를 입증할 증거와 목격자들이 사라질 수 있었다. 납치 실종자 가족들도 그가 빨리 입을 열기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은 ‘임시 인도 청구’ 조항에 희망을 걸었다. 현지에서 징역을 살기 전에 본국에 송환해 재판을 받을 수 있게 한 예외조항이었지만 전례가 없어 사문화되다시피 한 상태였다. 또 태국 정부가 거절하면 대책이 없었다. 전재만 주태국 대사와 차 총경이 쁘라차 쁘롬녹 법무장관을 찾아가 협조를 사정했다. 다행히 쁘롬녹 장관은 “한국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에서 연수를 받은 적이 있다”며 반가워했다. ‘근면 자조 협동’을 한국말로 또박또박 말하기도 했다. 이 ‘친한파’ 법무장관은 최세용에 대한 임시 인도 청구에 합의해줬다.
하지만 최세용이 태국 1심 판결에 항소와 상고를 하며 시간을 끌면 인도 절차를 시작할 수 없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그는 감옥에 면회 온 차 총경에게 “한국에 가면 여론재판이 열릴 것이고 내가 안 한 것까지 덮어씌워 법정 최고형을 받게 될 것”이라며 안 가겠다고 버텼다. 최세용은 안양 환전소 직원 살해와 필리핀 관광객 몇 명을 납치한 것은 시인하면서도 실종자들에 대해선 “모르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언제가 됐든 한국에 갈 테니 괜히 외국에서 고생하지 말고 빨리 가는 게 좋다”는 차 총경의 설득에 최세용은 동요했다. 몇 달 뒤 면회에서 그는 체념하는 모습을 보였다.
“살아갈 시간도 별로 없고 몸도 안 좋고…. 삶이 공허합니다.”
최세용은 항소를 포기하고 한국에 가기로 했다. 죗값을 치르려는 생각보단 자기 꾀에 스스로 넘어간 자충수였다. 그는 이번에 한국에 들어가 장기간 수감생활을 하다 보면 태국에서 받았던 9년 10개월형은 흐지부지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국에서 형이 확정되면 일단 태국에서 9년 10개월을 다 산 뒤 다시 한국에 들어와 새로 죗값을 치러야 한다.
한국 송환이 이뤄진 이달 15일 태국 방콕 공항에서 최세용은 수갑을 찬 채 현지 경찰관 전화로 차 총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 행색으로 한국에 들어가려니 부끄럽습니다. 옷 한 벌만 사주세요.”
당시 최세용은 남색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에 낡은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차 총경은 차갑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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