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축률 3% ‘저축의 날’… 배고픈 빨간돼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28일 03시 00분


29일 저축의날 50주년

빛바랜 '저축의 날' 50주년
올 2월 전국은행연합회 등 금융 관련 5개 협회와 금융위원회는 가계 저축률을 높이겠다며 ‘저축 캠페인’에 나섰다. 1980년대 초반 이후 30여 년 만에 당국과 협회, 시중 은행이 함께 길거리에서 저축 홍보 전단을 나눠주며 옛 정책의 향수(鄕愁)를 자극했다.

8개월이 지난 지금 시중 은행의 고위 관계자는 당시 캠페인에 대해 묻자 “우리가 그런 행사를 했었나요”라고 되물었다. 그는 “돈을 굴려 수익을 얻을 만한 곳이 없으니 예금이 들어와도 반갑지 않다”고 토로했다.

1964년 제정된 ‘저축의 날’이 29일로 50주년을 맞이하지만 은행조차 ‘애물단지’로 취급할 정도로 저축은 찬밥 신세가 됐다. 세계 최저 수준인 한국의 저축률(가처분소득 대비 저축액 비중)도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없다.

27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1988년 24.7%에 이르던 가계 저축률은 2000년에 한 자릿수대(8.6%)로 떨어졌고 지난해에는 3.4%에 그쳤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한국 가계 저축률은 2009년 22위로 스웨덴(12.9%) 프랑스(12.5%)는 물론이고 멕시코(10.0%) 칠레(7.2%)에도 못 미쳤다.

KB국민 우리 신한 하나 등 4대 시중 은행의 정기 예·적금 잔액은 올 1월 320조9115억 원에서 9월 316조3269억 원으로 4조 원 넘게 감소했다. 18년 만에 ‘재형저축’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이자소득세(주민세 포함 15.4%)를 면제해 주는 상품이 나왔지만 신규 가입자 수는 3월 88만 명에서 8월 1만9000명으로 급감했다.

저축이 이처럼 줄어든 건 정부가 내수경기 진작을 이유로 소비를 권장하면서 저축을 천덕꾸러기로 취급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1999년 10개에 이르던 세금우대저축을 하나로 통합해 혜택을 줄이고 신용카드 소득공제를 신설한 게 정책 기조 변화의 시작이었다.

이후로도 장기주택마련저축, 연금저축 등의 소득공제 혜택은 없애거나 축소했다. 올 들어서는 금융소득 종합과세 기준선이 4000만 원에서 2000만 원으로 낮아져 일부 부유층은 예금을 빼 골드바, 5만 원권 다발 등으로 바꿔 개인금고에 넣어두기도 한다. 임일섭 우리금융경영연구소 금융분석실장은 “통신비 사교육비 등 지출이 급증한 반면에 가처분소득이 좀처럼 늘지 않아 저축 여력이 줄어든 것도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국책 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1960∼80년대에는 경제 발전을 일으킬 자본이 귀해 저축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굳이 국민들이 저축하지 않아도 기업들이 돈을 구하기가 어렵지 않다”며 “국민과 가계를 경제성장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정부의 태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저축률이 줄어드는 만큼 가계 경제는 물론이고 국가 경제도 나빠진다는 점이다. 한국은행은 최근 보고서에서 “미국은 지나치게 낮은 가계저축률과 주택 구입에 따른 가계부채 증가가 글로벌 금융위기 및 구조적 경상수지 적자를 초래했다”며 “한국도 저축률이 현 수준에 머무르면 내수산업의 성장이 어려워져 대외 충격에 취약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우리나라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5000달러가 안 될 때도 가계저축률이 20%를 넘었다”며 “해외 경기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 내수를 발판으로 한 새로운 성장 동력을 모색하기 위해서라도 가계 저축률을 높이는 게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상훈 january@donga.com·신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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