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낭비 부르는 건보 지정기관제
1981년 제정 산업안전보건법… 공단서 정한 의료기관 검진만 인정
일부 대형병원은 지정기관서 빠져… 이중검진 안받으면 과태료 5만원
직장인 A 씨(48)는 해마다 서울아산병원에서 종합건강검진을 받는다. 10년째다. 올해는 7월에 약 47만 원을 들였고, 컴퓨터단층촬영(CT)까지 했다.
그는 검진을 다시 받아야 한다는 얘기를 회사로부터 들었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르면 사무직은 2년에 한 번, 비사무직은 매년 일반건강검진이 의무다. 문제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지정한 의료기관이 아니면 건강검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울아산병원은 건보공단으로부터 건강검진기관으로 지정받지 않았다. 이곳에서 아무리 비싼 돈을 내고 종합검진을 받았어도 지정기관에서 검사를 다시 받지 않으면 과태료 5만 원을 내야 한다.
결국 A 씨는 지난달 29일 건보공단이 지정한 곳을 찾아가 건강검진을 받았다. 청력검사, 시력검사, 문진은 하나같이 무성의했다. 예를 들어 서울아산병원에서 청력검사를 받을 때는 아주 작은 소리부터 큰 소리까지 서서히 들려주며 청력을 자세히 조사했다. 반면 이 기관에서는 큰 소리를 한두 번 들려준 뒤 “들리세요?”라고 물었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걸로 끝이었다. 시력검사도 간단하게 끝났다. 1시간 정도 걸린 검진은 신체검사에 가까웠다.
문진 시간에 의사는 두 가지를 물었다. “진단받은 질병 있으세요?” “운동은 꾸준히 하세요?” 예, 아니요 식의 대답에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됐다”고 했다.
A 씨는 “내가 어떤 질병을 갖고 있는지를 사전에 발견해 치료하려는 것보다는 빨리 한 사람 검진을 해치워버리고 싶어 하는 듯한 태도였다”며 “동네 의원만도 못한 주먹구구식 검진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는 “훨씬 고가의, 그리고 양질의 건강검진을 최고 수준의 의료기관에서 받았는데 시대에 뒤떨어진 법 때문에 검진을 다시 받아야 하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산업안전보건법은 1981년 제정됐다. 건보공단이 지정한 의료기관의 일반건강검진만 인정했던 이유는 부실한 병의원에서 검진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정부가 지정하지 않은 대형병원의 검진을 일반건강검진으로 인정하면 모든 병의원의 건강검진까지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건강검진기관 지정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부실한 의료기관뿐만 아니라 일부 대형병원이 지정기관에서 빠져 있어서 당초 취지에 어긋나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점이다.
건강검진기관으로 지정받으려면 병원이 자발적으로 신청해 건보공단의 조사를 받아야 한다. 일부 대형병원은 일반건강검진의 수익성이 낮은 데다 이보다 비용이 비싼 종합검진 신청자가 많아 건강검진기관으로 신청하지 않았다. 상급종합병원 중에서는 5개 병원(서울아산 세브란스 분당서울대 고려대안암 원광대)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5개 병원에서 종합검진을 받는 인원은 병원별로 적게는 7500명, 많게는 4만 명에 이른다. 5개 병원에서 검진을 받는 사람들을 모두 합해 계산해보면 한 곳당 한 해 평균 1만5000여 명이다. 이들 중 절반만 의무적으로 다른 곳에서 일반건강검진을 받아야 한다고 가정하면 연간 3만7500명이 대상이 된다. 일반건강검진에 드는 비용(1인당 4만1440원)은 건보공단이 모두 부담한다. 단순계산하면 최소 15억5400만 원이다. 중복해서 검진을 받으니 근로자의 불편 못지않게 건강보험 재정을 낭비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병원급 의료기관을 이용한 뒤 중복해서 검진을 받는 근로자를 감안하면 낭비되는 건보재정은 더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건보공단의 지정을 받은 검진기관은 부실하게 검진을 하고도 비용을 챙긴다. 시대에 뒤떨어진 법 때문에 이들 의료기관의 배만 불린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정형선 연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최근엔 자기 돈을 더 쓰고서라도 좋은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며 “법이 달라진 시대상을 반영해 대형병원의 종합건강검진을 일반건강검진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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