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유력한 다음 대통령 후보로 꼽히는 힐러리 로댐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 그는 완벽하게 몸에 맞으면서도 여성스러운 느낌을 주는 다양한 색깔의 바지 정장을 입는다. 언제나 짙은 색 정장을 입는 미국 여성정치인들의 패션과는 다른 모습으로 그는 각종 시사잡지뿐 아니라 패션잡지의 표지까지 장식했다. ‘힐러리 룩’이라 불리는 이 스타일은 한국인 여성 디자이너 손에서 탄생했다.
수재나 정 포리스트 씨는 2007년부터 클린턴 전 장관의 의상을 담당해온 디자이너.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베벌리힐스에서 최고급 맞춤정장 부티크(의상실)를 운영하고 있다. 클린턴 전 장관이 ‘글로벌 리더’를 넘어 ‘패션 리더’로 불리도록 만든 디자이너 포리스트 씨를 최근 베벌리힐스에 있는 그의 부티크에서 만났다. 꿈 많아 잠 못 이루던 소녀
‘수재나 베벌리힐스.’ 포리스트 씨가 운영하는 최고급 부티크이자 브랜드의 이름이다. 이 매장에서 판매하는 맞춤정장은 한 벌에 4000∼6000달러(약 420만∼630만 원)에 달한다. 고급스럽고도 편안하며 매력적인 맞춤복으로 알려져 미국 최상류층 여성 최고경영자(CEO)들과 억만장자의 부인들이 단골로 찾는다.
그는 어떤 과정을 거쳐 이렇게 성공하게 됐을까? 경북 의성군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 혼자 생계를 꾸려가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포리스트 씨는 꿈이 많은 소녀로 자라났다.
“우연히 외국 잡지에 나온 그림을 본 뒤로 막연하게 ‘예술가’의 꿈을 꾸게 됐어요. 미래에 내가 가질 세상을 상상하며 스케치하기를 즐겼어요. 꿈이 너무 많아 밤에 잠도 못 이룰 정도였지요.”(포리스트 씨)
1969년 디자이너를 꿈꾸며 무작정 미국으로 간 그는 힘든 생활을 했다. 집도 얻지 못해 차에서 쪽잠을 자며 뉴욕에서 패션스쿨을 마쳤고, 1976년 베벌리힐스에 지금의 시작점인 작은 부티크를 열 수 있었다.
“정말 힘든 순간에도 제 마음은 누구보다도 부자였어요. 저는 제가 결국 성공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거든요.”(포리스트 씨)
힐러리는 ‘이웃집 친구’ 같은 사이
그가 클린턴 전 장관을 처음 만난 것은 2007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클린턴 전 장관이 한창 미국 대통령선거 민주당 경선 후보로 떠올랐던 상원의원 시절이었다.
“론 버클(미국 유통업계의 재벌)의 집에서 열린 기금 마련 행사에 초대돼 참석한 자리였어요. 사람이 정말 많았는데, 그녀가 나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며 인사하더군요. ‘개인적으로 만나 의상을 부탁하고 싶다’는 말에 흔쾌히 승낙했지요.”(포리스트 씨)
그때 맺은 인연을 시작으로 포리스트 씨는 클린턴 전 장관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입는 거의 모든 옷을 디자인해왔다. 클린턴 전 장관의 공식 일정을 확인한 후 그가 방문할 곳의 기후와 문화, 행사 분위기나 참석자 등을 분석하고 판단해 옷을 디자인한다. 2009년 클린턴 전 장관이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당시 입었던 붉은색 정장도 그의 작품이다.
가장 완벽한 옷을 디자인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체형뿐만 아니라 그가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어떤 매력을 가졌는지까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는 클린턴 전 장관과 종종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눴고, 지금은 ‘이웃집 친구’처럼 친밀한 사이가 됐다고.
포리스트 씨는 클린턴 전 장관이 자신에게 들려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한국 학생들에게도 전하고 싶다며 들려주었다. 클린턴 전 장관이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가 밤하늘의 별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클린턴, 저 하늘의 별을 보거라. 넌 저 별을 손 안에 넣을 수 있단다. 그 별이 네 꿈이라면, 별이 네 것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 손을 열지 말거라.”
포리스트 씨는 “모든 사람은 저마다 가지고 태어난 재능이 하나씩 있기 마련”이라면서 “자신의 재능을 발견했다면 그 꿈을 말로만 표현하지 말고 현실로 이뤄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