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정을 파고 대형 스피커로 총소리, 호랑이 울음소리도 틀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오죽하면 올해 논에 모를 심지 않고 버려뒀겠습니까."
15일 전남 완도군 완도읍에서 뱃길로 50분 거리인 청산도는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유명한 섬. 2300여 명이 살고 있는 이 섬이 요즘 바다를 헤엄쳐 온 야생 멧돼지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멧돼지가 벼와 고구마, 옥수수, 호박 등을 먹어치우면서 이곳 주민은 작물 재배를 포기한 상태다. 서남해 섬은 날씨가 따뜻하고 야생동물 먹이가 풍부해 최근 몇 년 새 개체 수가 급증했다. 멧돼지는 섬에 천적이 없어 최상위 포식자가 된데다 번식력까지 강하다. 멧돼지의 횡포에 견디다 못한 주민들은 엽사를 불러 포획에 나섰지만 이미 '섬 주인'이 된 멧돼지를 몰아내기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청산도에 멧돼지가 출현한 건 6년 전. 10㎞ 정도 떨어진 생일도에서 한두 마리씩 헤엄쳐 건너온 멧돼지들이 지금은 150여 마리로 불어났다. 멧돼지가 헤엄치는 모습은 주민은 물론 야간에 낚시를 하는 외지인에게 자주 목격됐다. 야생생물관리협회 권성현 광주전남지부장(52)은 "멧돼지들은 영역다툼에서 밀리거나 사냥개가 출몰하면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 30~40㎞를 이동한다. 육지인 강진, 장흥에서 서식하던 멧돼지들이 10㎞ 바다를 건너 생일도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멧돼지는 후각이 뛰어나 바닷바람에 실려 오는 냄새만 맡고도 어느 섬에 먹이가 풍부한지를 알 정도"라고 덧붙였다.
멧돼지는 수 ㎞의 강이나 바다를 건널 수 있을 정도로 헤엄을 잘 친다고 한다. 특히 서해안의 경우 조류가 발달해 바닷물의 흐름을 이용하면 먼 거리도 충분히 건너갈 수 있다는 것. 광주 우치동물원 윤병철 사육계장(47·수의사)은 "멧돼지는 진흙 목욕을 좋아해 물과 친숙한데다 지능지수도 65정도로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이기채 청계마을 이장(55)은 "썰물 때 섬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면 멧돼지가 조류 흐름을 기가 막히게 잘 아는 것 같다"며 혀를 내둘렀다.
멧돼지는 섬 곳곳을 쑥대밭으로 만들기 일쑤다. 멧돼지는 가장 좋아하는 먹이인 고구마를 먹기 위해 날카로운 이빨로 쟁기를 갈 듯 밭을 파헤쳐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다. 옥수수와 시금치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고 지렁이를 찾기 위해 배추, 마늘, 양파, 밀을 파종한 밭을 마구 갈아엎기도 한다. 청산도는 올해 유난히 벼 피해가 많았다. 부흥마을 김영국 씨(44)는 "벼가 익는 등숙기에 낱알을 훑어 먹고 물이 고인 논에서 무리를 지어 뒹구는 통에 벼 수확을 포기한 농가가 꽤 많다"고 하소연했다.
멧돼지들은 한 밤중에 도로에 뛰어들어 운전자를 놀라게 하거나 민가 가까이 내려와 창고를 뒤지기도 한다. 김형운 도청마을 이장(69)은 "멧돼지 때문에 약수터를 가지 못한지 오래"라며 "3인 1조로 움직이는 포수들이 사냥개까지 배에 태워 들어와야 하는데 비용 때문에 동원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완도군은 청산도 뿐만 아니라 인근 노화도, 보길도, 소안도 등에서 멧돼지 피해가 급증하자 올 7월부터 포획허가를 내주고 야생동물 포획에 따른 지원 규정을 신설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현재 경남 통영시는 '야생동물에 의한 피해 예방 및 보상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 섬에서 멧돼지를 잡으면 마리당 20만 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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