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웬만한 남자보다 키가 크고 힘도 장사예요. 소리를 지를 때는 온 집 안의 접시가 흔들릴 정도예요. 한 번 화가 나면 누가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어요. 소주 4, 5병은 거뜬히 마시고 항상 취해 있어요. 우리 엄마는 괴물 엄마예요.”
권 군이 처음 가출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인 2011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권 군은 숙제를 빼먹는 일도 없었고, 청소 등 친구들이 꺼리는 일도 도맡아 해온 모범생이었다. 담임교사는 “궂은일을 도맡아 해 선생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모범생이었다. 때때로 별다른 이유 없이 소리를 지르고 주먹을 휘두르는 행동을 보이긴 했지만 사춘기 소년이 으레 겪는 반항심 탓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권 군의 가출이 잦아지자 담임교사는 굿네이버스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에 권 군의 사례를 알렸다. 담임이 수차례 권 군의 엄마와 면담 요청을 했지만 “우리 아들은 괜찮다”는 답변만 들었기 때문이다. 권 군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지난해 2월 굿네이버스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 최윤용 상담원은 학교에 가지 않은 채 집 주변을 배회하고 있던 권 군을 처음 만났다. 상담원이 “왜 학교에 가지 않았니”라고 묻자 권 군은 “그냥 엄마 때문에…”라고 답했다.
권 군은 정서학대 피해자였다. 굿네이버스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의 조사 결과 엄마 A 씨는 “넌 도대체 왜 그 모양이니” “너 때문에 엄마가 너무 힘들다” “넌 계속 쓸모없는 행동만 한다” 등 권 군을 무시하는 말을 습관적으로 해왔다. 때로는 “정말 살기 힘들다.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식의 말을 하기도 했다. 최 상담원은 “실제 만난 권 군의 엄마는 체구도 왜소하고 목소리도 크지 않은 평범한 여성으로 권 군의 표현처럼 ‘괴물’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라며 “매번 자신을 무시하는 엄마가 권 군의 눈에는 괴물처럼 보였던 탓”이라고 했다. 그는 또 “심리상담 결과 권 군의 마음에 내재된 분노감이 심각했다. 갑자기 주먹을 휘두르는 등 폭력적 행동을 보인 것도 분노감을 이기지 못해 비롯된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A 씨는 권 군의 방황이 자신의 잘못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훈육의 방식이었을 뿐”이라고 했다. 혹시라도 아들이 ‘아버지 없는 자식’이란 말을 들을까봐 걱정돼 강하고 외향적인 성격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설명했다.
정서학대는 ‘쓸모없거나 결함이 있는 존재’라는 인식을 반복적으로 아동에게 전달하는 행동을 뜻한다. 신체적인 폭력을 가하지 않아도 습관적으로 무시하거나 소리를 질러 공포 분위기를 만드는 행위, 가정폭력을 목격하게 하는 행위 등이 포함된다.
정서학대를 ‘훈육의 방식’이라고 착각하는 부모들이 적지 않다. 지난해 8월 정서학대 피해자로 접수된 뒤 치료보호시설에서 지내고 있는 초등생 김모 양(13)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성격이 급하고 외향적인 성격이었던 김 양의 어머니는 내성적인 딸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말과 행동이 느릴 때면 “넌 누굴 닮아서 그렇게 느리니”라며 혼을 내고 집 밖으로 쫓아내는 등의 행동을 일삼았다. 굿네이버스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 관계자는 “아이가 잘못을 했을 때 집 밖으로 내쫓아 모욕감을 주는 것도 정서학대의 대표적 유형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흔히 아동학대는 직접적인 폭력을 가하는 등의 신체학대가 대부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정서학대는 신체학대보다 많은 신고가 접수된다. 2012 전국 아동학대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접수된 아동학대 신고 건수는 정서학대가 38.0%(3785건)로 가장 많았고 신체학대(28.8%) 방임(28.7%) 성학대(4.5%)의 순이었다.
정서학대 피해 아동은 심리적인 불안과 낮은 자아존중감, 칭찬을 받기 위해 과도한 행동을 하는 등의 특성을 가진다. 장화정 굿네이버스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 관장은 “많은 사람이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때리는 것만 아동학대로 인식하고 있으나 ‘아동에게 소리 지르며 위협하는 행위’ ‘다른 아이와 수시로 비교하는 행위’ 등도 심각한 아동 정서학대의 유형”이라고 지적했다. 오늘(19일)은 ‘아동학대 예방의 날’이다. 아동학대 신고는 1577-1391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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