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등골 브레이커 ‘캐몽’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1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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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 아들은 며칠째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루는 잔뜩 울상을 짓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꼭 사고 싶은 패딩이 있어요.”

말을 들은 아버지는 기가 찼다. 80만 원대 노스페이스 패딩 점퍼를 사준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번엔 130만 원짜리 프리미엄 패딩 점퍼를 사달라니. 원래 입던 패딩은 어디 있느냐고 다그쳤더니 아들이 실토했다. 이른바 ‘일진’으로 불리는 학교 선배가 잠깐 입어본다고 가져간 뒤 돌려주지 않는다고.

아버지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당장 학교에 찾아가겠다고 했다. 선생님에게 얘기하고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붙잡고 빌었다. 소문나면 얼굴 들고 다니기 힘들다며 학교에 알리지 말아달라고 했다.

아버지의 고민은 현재진행형이다. 마땅한 해결책이 발견되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전문가들은 “대놓고 물건을 뺏는 일진의 행동도 문제지만 비싼 패딩을 입고 싶어 하는 요즘 10대의 어긋난 욕망도 문제”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올겨울 고가 패딩이 유례없는 매출 호황을 누리는 중이다. 이런 가운데 서울 강남의 일부 10대를 중심으로 프리미엄 패딩이 유행하며 새로운 ‘등골 브레이커’가 됐다. 등골 브레이커는 부모의 등골을 휘게 만들 만큼 비싸다는 뜻.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노스페이스(일명 ‘노페’)가 10대가 교복처럼 입을 만큼 인기를 얻으면서 나온 말이다.

프리미엄 패딩에 비하면 노페는 그나마 양반이다. 캐나다 구스, 몽클레르로 대표되는 프리미엄 패딩은 100만 원대부터 시작이다. 200만 원을 훌쩍 넘는 제품도 있다. 일부 부유층을 타깃으로 수입된 프리미엄 패딩은 지난해 말부터 ‘어른 노페’로 불리면서 인기를 끌더니 이젠 10대에게까지 확산되는 분위기다.

17일 오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A백화점 캐나다 구스 매장. 일부 제품은 이미 품절이라 구하기 힘들었다. 매장 안엔 부모와 함께 온 학생이 몇몇 눈에 띄었다. 매장 직원은 “올겨울 10대로부터 뽑은 매출이 지난해보다 3∼4배 늘었다”고 귀띔했다. 브랜드 측에서도 학생들이 이렇게 입을 줄 예측하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매장을 찾은 고2 김모 군은 “이제 ‘노페’가 아닌 ‘캐몽’(캐나다 구스와 몽클레르의 첫 글자를 따서 부르는 말)은 입어줘야 강남 패딩으로 인정받는 분위기”라고 했다.

일선 교사와 학부모는 이런 상황을 우려한다. 서울 송파구 B고 교사는 “그동안 노페는 부모의 심리적이자 경제적 마지노선이었다. 100만 원이 넘는 패딩을 입는 학생을 보면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론 오죽 졸랐으면 부모가 사줬을까 하는 생각에 안타깝다”고 말했다.

값비싼 패딩은 학교 폭력의 중심에도 놓여 있다. 일진이 갈취 대상 1순위로 패딩을 꼽는다. 실제로 부산 사하경찰서는 후배를 위협해 수십만 원대 패딩을 빼앗은 혐의로 여중생을 최근 붙잡았다. 서울과 경기 일대에서도 또래를 위협해 노페 패딩을 빼앗은 혐의로 중고교생이 잇따라 입건됐다.

인터넷 장터에선 훔친 패딩을 싼 가격에 팔겠다는 10대의 글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학교 현장에선 학생들이 패딩을 입는 겨울철에 패딩 갈취가 늘면서 학교 폭력 역시 급증한다는 말까지 돈다.

신종호 서울대 교수(교육학과)는 “모방 심리가 강한 건 10대의 특성”이라면서도 “과도한 사주기는 청소년 정서에 좋지 않다. 부모가 자녀의 욕심을 적극 억제할 필요성이 있다”고 조언했다.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등골 브레이커#캐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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