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7일 오전 3시경 고정원(가명·28) 씨는 1.4t 트럭 운전석에서 잠을 깼다. 회식이 끝나고 대리운전기사를 기다리며 잠든 지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주류회사 물류관리직이던 그는 이날 서울 강남으로 배송 업무를 지원하러 나갔다. 업무가 끝난 뒤 이어진 회사 송년회에서 술을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깨어난 뒤에도 술기운이 남아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내일 출근도 해야 하는데….’ 정원 씨는 잠시 고민하다 시동을 켰다.
조금 잤으니까 괜찮겠지 싶었다. 일부러 차창을 모두 열었다. 추우면 안 졸릴 거라 생각했다. 출발한 지 30분쯤 지났을까.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올림픽대로를 달리던 정원 씨의 차는 갑자기 속도를 높이면서 옆 차선의 택시를 들이받은 뒤 다시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다. 음주로 인한 졸음운전이었다. 안전띠도 매지 않았던 정원 씨는 충격으로 차체 밖으로 튕겨 나왔고 그 위로 트럭이 덮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병원이었다. 약 9시간에 걸쳐 대수술을 받았다. 얼굴뼈가 분쇄 골절됐고 온몸에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 많이 다쳐서 묶어뒀나?’ 호흡기도 손상돼 말을 할 수 없었던 정원 씨는 간호사의 손바닥에 글씨를 써서 물어봤다. ‘왜 다리가 안 움직여요?’ 돌아온 대답은 믿기 어려웠다. “앞으로 다리가 평생 안 움직일 거예요.” 정원 씨 위로 트럭이 덮쳤을 때 척추가 손상돼 하반신이 마비된 것. 평생을 휠체어에 의지해야 한다고 했다. 충격이었다.
지난달 27일 경기 의정부시의 한 재활병원에서 정원 씨를 만났다. 사고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사귀던 여자친구와 청첩장을 돌리고 있었을 것이다. 지난해 이맘때 “내년 겨울에 결혼하자”고 여자친구와 약속했으나 올 3월 헤어졌다. 경찰이 채혈로 측정한 정원 씨의 당시 혈중 알코올 농도는 0.119%. 결혼해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던 그의 소박한 꿈은 음주운전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정원 씨는 장애 1급 판정을 받고 기초생활수급 대상자가 됐다. 산업재해보상은 음주운전 때문에 받을 수 없었다. 장애인연금, 교통사고 피해자를 지원하는 교통안전공단 지원금을 받는 것이 전부다.
“제일 후회되는 건 음주운전, 그 다음은 안전띠를 안 맨 거예요.”
#2. 음주운전이 앗아간 아버지의 빈자리
김국기 군(14)은 돌아가신 아버지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국기 군이 여섯 살 때인 2005년 4월 16일 1t 트럭을 몰고 충북 음성군 중부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만취한 30대 여성 운전자(당시 혈중 알코올 농도 0.088%)의 차량이 옆 차선에서 들이받아 사망했다. 체육교사가 꿈인 국기 군이 제일 좋아하는 운동은 태권도. 하지만 승급시험을 치르고 합격을 해도 기뻐해줄 아버지는 곁에 없었다. 지난달 30일 충북 청원군의 한 읍내에서 만난 국기 군은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마다 얼굴도 모르는 가해차량 운전자가 원망스럽다고 했다.
누나 은애 씨(21)는 사고 당시 13세였다. 아버지의 회사 동료들이 사고 소식을 전하러 찾아왔을 때 아무 말 없이 울기만 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무슨 정신으로 장례를 치렀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저 모든 절차가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방 좀 닦아라” “물 좀 가져와라” 하던 아버지의 잔소리가 없다는 걸 깨닫고 그제야 죽음을 실감했다.
은애 씨는 교통경찰이 되고 싶어 세명대 경찰행정학과에 진학했다. 자신처럼 허무하게 가족을 잃는 사람이 없도록 힘을 보태고 싶었다.
“가끔 언론에서 음주운전 이야기가 나오면 ‘차라리 죽어라, 저 혼자 죽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가해자는 멀쩡하게 살아서 벌 받는 것도 잠깐이고 다시 운전도 하면서 잘살잖아요. 그러다 문득 제가 이런 나쁜 생각을 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죠.”
남매의 어머니 신현숙 씨(52)는 “음주운전은 살인의 시초”라고 말한다.
“음주운전으로 인해 죄 없는 가족들이 얼마나 큰 짐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안다면 절대 음주운전 못할 거예요.”
○‘음주운전=범죄’ 사회적 공감 필요
음주운전은 자신과 타인의 삶을 망가뜨리는 무서운 범죄이지만 이를 제대로 인식하는 운전자는 많지 않다. 취재팀은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테헤란로에서 오전 11시 반부터 1시간가량 강남경찰서 교통안전3팀의 음주운전 단속현장을 동행 취재했다.
이날 술을 마셔 음주측정을 한 운전자는 7명. 혈중 알코올 농도 0.092%로 면허정지 처분을 받은 A 씨(28)는 “요 앞에 친구 좀 내려주려다 그랬다”며 “(단속에) 걸리면 걸리는 거죠, 죄송해요”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투로 말했다. 혈중 알코올 농도 0.045%로 단속을 면한 B 씨(25)도 “맥주 500cc 딱 두 잔밖에 안 먹었다”며 “(목적지가) 바로 앞이라 괜찮다”고 되레 큰소리쳤다. 이날 단속 기준(혈중 알코올 농도 0.05% 이상)에 걸린 운전자는 2명. 이 중 한 남성(54)은 단속에 3회 이상 걸린 ‘삼진아웃’에 해당돼 면허취소 처분을 받았지만 역시 반성하는 기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음주운전 단속 건수는 2009년 처벌 강화 및 2010년 음주운전 대국민서명운동 등의 영향으로 감소하고 2011∼2012년 단속 강도를 낮추는 대신 홍보 및 교육활동을 강화하면서 꾸준히 감소세를 보였다. 하지만 지난해 음주운전 교통사고 발생건수는 2만9093건으로 전체 교통사고의 13%. 사망자 수는 815명으로 2011년(733명)보다 11% 증가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음주운전에 무감각하다. 보건복지부의 국민건강통계(2011년)에 따르면 최근 1년간 운전 경험(이륜차 포함)이 있는 응답자 3312명 가운데 17.4%가 음주운전을 해봤고, 음주운전 차량의 조수석에 동승해봤다는 응답자도 조사 대상자(6027명)의 17.4%나 됐다.
전문가들은 처벌 강화와 더불어 음주운전이 범죄라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음주운전이 범죄행위라는 자각과 사회적 비난이 음주운전 예방에 큰 기여를 한다는 분석이다. 명묘희 도로교통공단 선임연구원은 “주로 직장을 중심으로 음주문화가 형성된 만큼 성폭력 교육처럼 직장 내 교육을 통해 음주운전에 대한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며 “미국 일본 등 선진국처럼 ‘우리나라 운전자는 절대 음주운전을 하지 않는다’는 상식에 호소하는 캠페인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