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른두 쪽짜리 베이지색 그림책. 집어 드니 생각보다 가볍다. 이 책을 펼치는 이들은 열이면 열 모두 눈이 아니라 코를 먼저 책장으로 가져간다. 킁킁… 킁킁…. 갈피마다 수상한 냄새가 조금이라도 피어오르지 않는지 탐색한다. 흠, 냄새는 여느 책과 크게 다르지 않다. 냄새 체크를 마친 뒤에야 그림책을 찬찬히 살펴본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책장을 넣어 조심스럽게 만져본다. 책의 구석구석에 손을 대는 데 결코 주저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종이는 도톰하고 가슬가슬하다. 자잘한 나무껍데기? 풀 부스러기? 알 수 없는 작은 조각들이 종이에 섞여있으니 얼핏 한지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
전화벨이 울렸다. “이 코끼리는… 아유, 파란색 비닐을 먹었나 봐요!” 또 다른 전화가 걸려온다. “반짝반짝 은가루 같은 게 종이에 있네요. 이 코끼리는 뭘 먹은 걸까요?”
동물책 전문 출판사 ‘책공장더불어’의 김보경 대표(44)는 호기심 많은 독자에게 웃으면서 대답한다. “코끼리마다 먹은 것도 다르고 배설 능력도 다 제각각이어서 똑같은 종이가 한 장도 없어요. 글쎄요, 코끼리가 그 똥을 싼 날, 뭘 먹었을까요?”
○ 코끼리 똥 10kg으로 A4 종이 660장 생산
야생 코끼리가 많은 스리랑카에서는 인간과 코끼리 사이에 마찰이 잦았다. 인간들이 나무를 베고 코끼리의 서식지를 파괴하면서 굶주린 코끼리가 민가와 농장으로 내려오곤 했다. 사람들이 코끼리를 해치거나 죽이는 일도 반복됐다.
코끼리는 매일 180kg 정도 먹고, 16번가량 똥을 싼다. 초식동물인 코끼리는 풀과 과일, 나뭇잎, 나무껍데기 같이 섬유질이 풍부한 음식을 먹는다. 사람들은 코끼리 똥으로 종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똥 종이’를 만드는 과정은 이렇다. 코끼리 똥을 햇볕에 말린 다음, 세균을 없애기 위해 하루 종일 말린 똥을 끓인다. 끓인 똥을 분쇄기에 넣어 잘게 부수면서 섞는다. 걸쭉해진 똥을 물통에 넣어 체로 거르면 마법처럼 두꺼운 종이가 만들어진다. 이를 압축기로 눌러서 물기를 제거하면 얇은 종이가 된다. 이 종이를 그늘에서 말린 뒤에 쇠로 된 두 개의 원통 사이를 통과시키면 구김이 펴지면서 사용 가능한 종이가 된다. 코끼리 똥 10kg이면 A4 종이 660장이 나온다. 이렇게 온전히 코끼리 똥만 이용해서 종이를 만들 수 있다.
스리랑카의 사회적 기업 ‘막시무스’는 코끼리 똥을 이용해 종이와 책, 물품을 만든다. 코끼리 똥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줬고, 그 수익금은 코끼리 보호소 운영비로도 쓰인다. 살기 위해 코끼리를 죽이던 사람들이 그 똥 제품을 생산하면서 코끼리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 스리랑카서 6개월 걸려 책 제작
김 대표는 TV를 보다가 우연히 코끼리 똥 종이를 만드는 과정을 담은 외국 그림책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코끼리 똥 종이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그 과정을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보여준다는 점이 끌렸다. 동물과 공존하는 그 창의적인 방식이 좋았다.
수소문하다 보니 한국공정무역연합이 그 그림책 원서를 들여와서 판매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쉽게 생각했다. 스리랑카에서 종이를 가져와서 한국에서 인쇄를 하면 되겠다고.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곳에서 사람과 코끼리가 함께 평화롭게 사는 것은 일자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스리랑카에 모든 작업을 맡기고 완제품을 들여오기로 했다.
11월 말 코끼리 똥 종이로 만든 그림책 ‘똥으로 종이를 만드는 코끼리 아저씨’가 6개월 만에 한국에 도착했다. 한국에서는 인쇄를 시작해 책이 나오기까지 사흘에서 길어야 일주일이면 된다. 코끼리 똥 종이는 종이 제작부터 수작업이어서 일이 더디다. 종이의 기본 재료가 코끼리 똥이다 보니 코끼리가 잘 먹고 잘 싸기를 기다려야 했다. 주문을 많이 한다고 코끼리가 더 많이 배설하는 것은 아니니까. 친구가 그랬다. “얘, 넌 재생지 재생지하더니 이제는 똥이니?”
○ 8년간 도서 20종 모두 재생지로 만들어
김 대표는 10여 년간 여성지 기자로 일하다 2006년 출판사를 차리면서부터 재생지를 쓰기로 결심했다. 나무가 잘 지켜져야 동물들이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처음에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조언을 구했지만 막막함만 남았다. ‘종이 품질이 나빠서 독자들한테 욕먹는다’ ‘3개월만 지나면 헌책 된다’ ‘종이가루가 많이 나와서 인쇄소에서 꺼린다’….
한숨부터 나왔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제지회사에 문의하니 단행본을 만들 만한 재생지는 종류가 다양하지 않고, 그나마 수급에 변수가 많았다. 수입 재생지는 턱없이 비쌌다. 폐지 사용률 100% 재생지를 어렵게 찾았지만 제지회사 측은 “단행본에 쓰면 문제가 생길 것 같다고 영업부 쪽에서 판매를 만류한다”고 했다. 김 대표가 “모든 문제를 감수하겠다”고 겨우 설득했다.
그렇게 나온 책이 ‘채식하는 사자 리틀 타이크’다. 그렇게 지난 8년간 책공장더불어의 책 20종 10만 부 이상을 모두 재생지로 만들었다. 나무를 제법 많이 살린 것 같다.
○ 일반 종이와 가격차이 거의 없어
재생지로 책을 펴내는 게 뭐가 그리 대수냐 싶지만, 종이 가격이나 작업 속도 측면에서 두 손 들고 환영할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 “재생지가 당연히 가격이 훨씬 저렴할 거라고 대부분 생각하시는데 아니에요. 일반 종이랑 가격차가 거의 없어요.”(지업사 ‘탑페이퍼’의 문효진 대리)
4×6전지(788×1091mm) 또는 국전지(639×939mm) 500장을 1연(連·종이 세는 단위)이라고 한다. 일반 모조지 4×6전지가 3만∼4만 원대인데, 재생지도 그 가격대다. 수입 재생지는 1연당 10만 원을 넘는 것도 있다. 굳이 그런 재생지를 쓰는 곳이 있을까. 문 대리의 말이다.
“기업에서 환경친화적인 이미지를 내세우고 싶을 때 주로 선택하죠. 값비싼 수입 재생지로 제작하고 ‘재생지로 만든 달력입니다’ ‘우리 회사는 환경을 사랑합니다’라고 적어요. 홍보용, 이벤트성으로 쓰는 거죠. 잠시 그러다가 슬그머니 일반 종이로 바꾸는 경우가 많아요.”
정승모 정원문화인쇄 대표의 말에 따르면 ‘반지르르한 일반 종이가 아니라 퍼석퍼석한 재생지’로 인쇄를 할 때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인쇄기의 고무판 등 부품을 싹 갈고 기계 세팅도 새로 한다. 일반 종이는 1만 장을 찍어도 아무 문제없이 인쇄기가 씽씽 잘 돌아가는데, 재생지로는 500장만 찍어도 기계가 멈춰버린다. 재생지의 종이 가루가 기계에 붙어버리는 탓이다. “재생지를 쓰면 ‘인쇄발’이 안 삽니다. 김 대표 출판사가 하도 재생지만 고집하니까…, 우리 인쇄소에서는 골치예요.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죠.”
어느 날 정 대표는 김 대표에게 우회적으로 얘기한 적도 있다. 다른 인쇄소에서 찍으라고. 그동안 둘이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8년쯤 지나니 정 대표는 이제 나무를 지키고자 하는 김 대표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단다.
○ 일부 독자들 “종이색 어둡다” 항의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많은 출판사들이 재생지를 써야 하는 취지에는 공감한다. 하지만 선뜻 실행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독자가 항의하거나 그로 인해 매출이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실제 한 출판사는 재생지는 아니지만 재생지 느낌이 나게 만든 종이를 쓴 적이 있는데, 독자들로부터 종이 색이 어둡다는 등 항의가 빗발쳤고 반품 사태가 이어지는 쓴 경험을 했다.
김 대표도 온라인서점의 독자 리뷰를 읽다가 충격을 받았다. ‘책공장더불어가 이 좋은 책을 제본책보다 못하게 펴낸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화난다. 다른 출판사가 다시 출판했으면 좋겠다.’
김 대표는 상처도 받았지만, 재생지를 사용하는 뜻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 점은 반성했다. 그래서 종이에 불만을 가진 독자에게 일일이 온라인을 통해 설득했다. “나무가 살아야, 숲이 살아야 동물도 삽니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가 2009년 7월부터 약 2년간 재생지 출판을 권장하는 ‘숲을 살리는 녹색출판’ 캠페인을 펼쳤지만 주목할 만한 이슈로 만들지 못하고 사라졌다.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은 향후 비슷한 캠페인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녹색출판 캠페인 시작부터 지금까지 본문 내지의 80% 이상을 재생종이로 만든 책에 부여하는 재생마크를 받은 책은 총 452건. 재생지를 쓰고도 재생마크를 달지 않는 출판사도 있다. 한 출판사 대표는 “재생지가 싸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의 인식 때문에 재생마크를 달면 책 가격을 책정하기가 부담스럽다”고 했다.
김 대표의 말이다. “책공장더불어야 작은 출판사라서 이런 작업이 가능하지만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인식이 바뀌지 않은 상황에서 대형 출판사들이 쉽사리 재생지를 선택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 재생지 책이 특별할 게 없는 날 꿈꿔
서울 종로구 혜화동 책공장더불어의 작은 사무실에 전화벨이 울린다. 인쇄소에서 걸려온 전화라는 말에는 지금도 김 대표의 가슴이 덜컹한다. 샘플 북이 나올 때까지는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이번에는 고등학교 환경동아리 소속 학생이다. “저희가 재생지로 책을 만들어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는지 좀 여쭤보려고요.”
김 대표의 웃음 띤 얼굴에서 설명이 청산유수 흘러나온다. 재생지로 책 만드는 것이 특별할 게 없는 일이 되는 날이 저기 보이는 것 같다. 행복하게 똥을 싸는 코끼리가 눈에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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