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술(76·사진) 전 미래산업 회장이 1월 15일 KAIST(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에 재산 215억 원을 또 기부했다. 2001년(300억 원)에 이어 두 번째로, 총 515억 원을 기부한 것이다. 그는 “부를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기부했다”고 말했다.
정 전 회장의 쾌척에 대해 ‘아름다운 기부’라는 평가가 줄을 잇지만 정작 그는 지난 1년간 숱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벤처 1세대 대표주자로 기부를 실현한 따뜻한 기업인’이라는 호평도 있었지만 ‘최고점에서 주식을 전량 팔아치운 부도덕한 기업인’이라는 비난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극의 평가는 제12대 대통령선거(대선) 열기가 고조되던 1년 3개월 전 사건에서 비롯했다. 그는 1월 초 두 번째 기부를 결심한 직후 그동안의 고뇌를 털어놨다. 며칠 사이 삼성전자보다 거래 많아
2012년 9월 초 대통령 유력 후보로 거론되던 안철수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현 의원)이 곧 출마를 공식 선언하리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를 계기로 이른바 ‘정치테마주’가 고삐 풀린 말처럼 움직였다. 정 전 회장이 1983년 창업한 미래산업은 ‘안철수테마주’로 분류돼 연일 상한가를 기록했다.
“당시 며칠 사이 거래 규모가 삼성전자보다 많았어요. (미래산업은) 쪼그만 기업인데, 어찌 그런 현상이 생길 수 있는가 말이야. 말도 안 되는 비정상적인 일이 벌어진 거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어.”
엄청난 ‘손바뀜’(상장주식 회전율)이 벌어지면서 다른 정치테마주도 일제히 날뛰었다. 이른바 안철수 관련주로 분류되는 안랩 등 14개, 문재인 관련주로 소문난 우리들생명과학 등 10개 기업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상한가를 쳤다. 손바뀜이 며칠 사이 70여 차례에 이른 경우도 있었다. “특정 후보가 대권을 잡으면 관련 회사들이 급성장할 것”이라는 3류 소설 같은 시나리오가 투기 심리를 부추겼다.
그해 9월 14일 정치테마주가 최고점을 경신하던 날 정 전 회장은 보유 주식 전량(2254만여 주·7.49%)을 돌연 장내에서 매각했다. 그뿐 아니라 미래산업의 대표와 사외이사도 같은 시점에 보유 주식을 매각했다.
최대주주의 갑작스러운 주식 매각은 시장에 큰 충격파를 던졌다. 회사 최대주주, 그것도 설립자인 정 전 회장이 주식을 팔아버린 것과 매각 시점이 2002년 상장 이후 10년 만에 최고가를 기록한 다음 날이었다는 미묘한 타이밍이 얽히면서 더 충격을 안겼다.
이 두 가지 요소에 정 전 회장이 ‘안철수 후보와 긴밀한 관계’라는 소문까지 겹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온갖 악소문이 양산됐다. “정 전 회장이 정치테마주를 이용해 돈을 챙겼다”는 루머가 대부분이고 일각에선 “정 전 회장이 주식을 매각해 안철수 후보를 정치적으로 지원하려 한다”는 정치연계설까지 흘러나왔다. 시장에서는 당시 정 전 회장이 시세 상승으로 얻은 차익을 300억 원 정도로 추산했다.
“나는 정치테마주라는 것이 애당초 못마땅했어요. 주식시장은 곧 산업을 건전하게 육성하려고 투자 자본이 오가는 곳이어야 하는데, 미래산업 주식을 사고파는 사람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건전한 투자자라기보다 투기꾼들이었어요. 이건 마치 미래산업을 ‘도박장’처럼 만들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래서 정치테마주에 쐐기를 박고 싶었어요. 내가 혼자 욕먹더라도 투기꾼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하고 싶었던 겁니다.”
주식 매각 이후 인터넷 등에서는 연일 정 전 회장에 대한 악성댓글이 이어졌다. 스스로를 ‘선량한 투자자’라 밝히며 “돈을 돌려달라”는 단순 하소연을 넘어,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글도 상당수 포함됐다. 그러나 정 전 회장은 이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기자회견은 물론, 보도자료도 내지 않았다. 정 전 회장이 입을 연 것은 일부 신문이 시장 루머를 여과 없이 보도하면서였다. 자신의 의도가 왜곡된다고 느낀 정 전 회장은 당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봅시다. 기업이 정치권력과 결탁했다 해서 잘되는 겁니까. 그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작전세력에게) 강력한 경고를 주고 싶었어요. 나는 안철수라는 사람을 모릅니다. 10여 년 전 한두 번 본 일은 있지만, 이후엔 만난 적도 없어요. 나이 차이도 큰데 내가 왜 만나겠어요. 미래산업 주가는 앞으로 더 오를 수도 있고, 내릴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왜 권력 눈치를 봐야 합니까. 더는 정치에 휘둘리면 안 되겠다 싶어 그날 주식을 처분한 겁니다.” 거품 폭탄 터지면 회사 휘청
그는 “그래도 대주주의 주식 전량 매도는 ‘책임경영’과는 거리가 있지 않느냐”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자기 소신을 폈다.
“나는 12년 전 이미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사람이에요. 내가 경영권에 욕심이 있었다면, 주식을 모두 팔았겠어요. 적당히 남겨두고 이래라저래라 했겠지. 그러나 나는 이미 신변정리를 모두 마쳤어요. 경영진과 전화통화도 하지 않은 지 오랩니다(실제 정 전 회장은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지 않는다. 며칠 후 식사 약속도 하지 않는다. 메모를 남겨두면, 불쑥 전화해 당일 사람을 만나는 것을 생활화했다. 심지어 그는 2001년 300억 원을 KAIST에 기부했지만 자기 이름을 딴 연구동 준공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나는 미래산업 설립자로서 직원들에게 약속한 바가 있어요. 첫째, 미래산업을 반드시 사원들에게 넘겨주겠다는 것인데, 이번에 내가 주식을 전량 매각하면서 우리사주조합이 최대주주가 됐습니다(정 전 회장의 당시 지분보유율은 7.49%. 이에 따라 2%를 보유한 우리사주조합이 최대주주가 됐다).
둘째, 전문경영인 체제를 지키겠다는 약속인데, 이것도 실천했습니다. 미래산업에는 내 자식을 포함해 일가친척이 아무도 없습니다. 현 경영진이 책임지고 키워나갈 겁니다. 또 한 가지는 기업 가치를 지키는 일인데, 나는 미래산업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권력이나 정치와 밀착돼 성장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번 일로 (정치테마주를 탈피함으로써) 그 가치를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정 전 회장은 자신의 행동이 주가를 터무니없이 끌어올린 작전세력에게 ‘철퇴’를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고점에서 매각하면 ‘손 바꾸기’ 작전으로 주가를 끌어올린 세력이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될 테고, 그럼 차후 정치권력을 빙자한 비정상적인 투기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소신에서였다.
그의 예상대로 미래산업 주가는 이후 6거래일 연속 하한가를 기록했고, 2주 만에 최고점 대비 5분의 1 수준인 500원대로 급락했다. 작전세력이 400억 원을 쏟아부었다고 가정하면 단기간에 300억 원 이상 큰 손실을 본 셈이다.
“언론도 사안을 더 정확히 보길 바랍니다. 왜 투기꾼을 옹호합니까. 정치테마주에 대해 우리 모두 생각을 고쳐먹어야 한다고 봅니다.”
정경유착을 ‘미끼’로 작전을 벌인 세력에 철퇴를 내린다는 명분도 그렇지만, 정 전 회장이 주식 매각을 단행한 결정적인 이유는 미래산업의 ‘미래’ 때문이었다고 한다. 작전세력은 언젠가 거품 폭탄을 터뜨리며 빠져나갈 텐데, 그럼 주식이 폭락하면서 회사 자체가 휘청거릴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일부 선량한 투자자도 피해를 입겠지만, 애꿎은 직원들까지 피해자가 될 것이 빤했다. 또한 주가가 폭등하자 우리사주를 받은 일부 직원이 동요하기도 했다. “주가가 오른 김에 주식을 팔아치워 한몫 챙기자”는 심리 때문에 회사를 떠나려는 움직임까지 나타났다는 것이다. 주가가 문제가 아니라 직원들이 떠나버려 미래산업 경영 자체가 위태로웠다고 그는 말했다.
정치를 빙자한 작전세력에 대한 철퇴, 미래산업을 살려야 한다는 신념을 감안한다 해도 그가 예상 밖의 엄청난 차익을 올린 건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지난 1년간 논란의 불씨가 됐다. 이에 대해 매각 직후 정 전 회장은 이런 말을 남긴 바 있다.
“나는 이미 수백억 원을 기부했어요(그는 2001년 KAIST에 300억 원을 기부했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건 두고 보면 알 거예요. 지금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있어요. 자선을 할까, 장학재단을 만들어볼까, 아니면 직원들에게 증여할까….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아요. 심사숙고해 정말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려 합니다.”
결국 정 전 회장은 올해 초 다시 KAIST 기부를 선택했다. 1년 3개월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조사가 있었다”고만 대답했다. 그는 금융감독원과 국세청 등으로부터 작전 개입 여부, 부당거래 여부 등을 조사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 전 회장은 “조사가 꽤 오래 걸렸고 그 모든 것이 마무리됐기 때문에 이제야 (기부를) 결행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오래 기다린 이유는 외부 상황 때문이라는 것이다.
“추천서만 써줬는데 억울”
그는 재산을 아낌없이 기부함으로써 돈에 대한 오해를 풀었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의문은 있다. 과연 미래산업을 ‘안철수테마주’로 부를 만큼 정 전 회장은 안 의원과 긴밀했을까. 작전세력의 주장대로 안 의원이 ‘멘토’라고 부를 정도로 두 사람은 친밀했을까. 올 초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그는 안 의원과의 관계를 상세히 설명했다. ▼ 안 의원이 (정 전 회장을) 멘토라 부른다고 해서 미래산업이 정치테마주가 된 것이 맞는지요.
“나도 억울한 면이 있어요. 나는 안철수 씨와 가까운 사람이 아니에요. KAIST에 기부한 뒤였어요. KAIST에 미래를 볼 줄 아는 눈이 있는 사람들이 미국 유학을 다녀온 안씨를 데려오고 싶어 했어요. 양측이 서로 이야기가 잘 됐는데, 안씨를 대학으로 데려오려니 정교수를 시켜줘야 하는데, 경력 조건이 안 맞는 거예요. 초빙교수로 하기에는 걸맞지 않고…. 그때 그 사람들이 연구한 것이 뭐냐면, 기부한 내가 (추천을) 하면 모든 것(절차)을 생략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교수 임명하는 데 아무런 무리가 없다며 나에게 부탁해왔어요. 가만 듣고 보니 학교 처지가 그렇다는데, 도움을 주는 게 좋겠다, 그래서 서명을 해줬단 말이지. 추천서를 만들어줬어요.”
그 뒤 정 전 회장은 안 의원을 잊고 지냈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신문에 정 전 회장이 그를 추천해 안 의원이 KAIST 석좌교수가 됐다는 보도가 대대적으로 나왔다.
“국정감사장에서 안 의원을 공격하며 ‘누가 추천했느냐’ 하니까 실제로 한 사람들은 뒤로 빠지고 추천서를 써준 내가 장본인이 된 거죠. 그래서 시장에서는 더더욱 내가 무슨 ‘멘토’다 뭐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오해 여지가 부풀려졌단 말이야. 증권쟁이가 볼 때는 ‘교수로 추천할 정도면 끈끈한 사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에 테마주가 된 듯하고. 친하다는 소문 정도가 아니고 근거(추천서)가 있으니까.” ▼ 서로 연락한 적은 없나요.
“그 사람과는 전화도 안 해요. e메일로 연락이 온 적은 있는데, 뭔 부탁이 왔느냐면…. 박원순 변호사(현 서울시장)가 하던 아름다운재단에 안 의원이 이사로 돼 있었어요. 거기에 200억 원 정도 자산이 모였는데, 거기서 변호사와 경영지도 그룹을 두고 벤처 지망생이 오면 자금과 법적문제 지원 등 뭔가를 한다는데, 그 책임자로 안 교수가 추천됐던가 봐요. 그런데 안씨가 내게 e메일로 핑퐁을 친 거여. 자기보다 내가 하면 어떻겠느냐고 말이지. 나중에 (박 변호사 쪽 사람이) 나한테 와서 설명하기에 내가 다시 핑퐁을 쳤어. ‘당신이 적합하지, 나는 그런 직책을 맡을 만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그런 일이 있었어요.”
정 전 회장은 아름다운재단의 벤처사업 제의를 거부한 이후에도 안 의원과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했다.
“안 의원은 전화 한 통화도 안 걸어. 그런 사람이여. 그것(제안)도 나한테 e메일로 하고 말이야.”
정 전 회장은 아들뻘인 안 의원이 전화는커녕 e메일로 자신에게 연락한 것을 오히려 못마땅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봐요. KAIST 교수가 됐으면 자기는 알 거 아냐. 그러면 한 번 와서 인사하는 게 예의지. 명함도 찍어서 다니더래요, ‘안철수 석좌교수’라고. 마음이 소심해서 그런 것 같아…. 그런 걸 보면 정치 지도자로서는….”
2012년 정치테마주 파동 당시에도 안 의원이 연락조차 없기는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그때는 미래산업만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안랩 주가도 같이 뛰었지. 그런데 안 의원은 쪼금 무딘 사람이기 때문에 그 위험을 못 느꼈을 거요. 안랩 주식도 올라가면 언젠가 내려와야 할 텐데. 그렇게 짧은 기간에 뛰니까 거기서 문제가 생기는 거요. 당시 11일부터 19일까지 8일간 큰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을 내가 몸으로 막았거든. 그런데 그 사람은 그걸 모를 거야.”
안철수 의원 전화 한 통 없어
그러면서도 정 전 회장은 안 의원에 대해 충고를 곁들였다.
“그 사람, 아까운 사람인데. 뭔가 홀린 것 같아. (정치판에) 잘못 걸려들었어. 그렇게 성공한다 해도 그게 뭐요. 아주 고매하게 살아야지. 좋은 사람이 아까워 죽겠어. 양식 있는 지도자로 남았으면 훨씬 힘도 있고, 할 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정치에…. 지금이라도 털어버려야 할 텐데.”
정 전 회장은 1977년 매입한 서울 서초구 청계산 초입에 자리한 단독주택에서 이사 한 번 하지 않은 채 지금까지 살고 있다. 이 주택은 “마지막 남은 유일한 재산(부동산)”이라고 했다. 94년 개축한 집 뒷마당에는 철쭉을 듬뿍 심어놨고, 조그만 텃밭도 가꾸고 있다. 2층 서재는 책으로 가득 채웠다. 시간 날 때마다 책 읽기를 낙으로 삼기 위해서다.
“나는 철학이나 이념 같은 건 모르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돈을 돌같이 여기며 사는 것, 그리고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것은 지키고 살았어요. 행동주의! 결국 나는 돈과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생각해요. 그 정도면 될 듯해요.”
후배 벤처 기업인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묻자 정 전 회장은 말보다 실천을 강조했다.
작전세력의 이른바 ‘정치테마주’ 띄우기는 2012년에만 벌어진 일이 아니다. 2007년 대선 때도 이명박 후보와 관련한 소문에 기업들 주가가 급등했다. 거기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무명 기업까지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결국 시간이 흐르고 작전세력이 연기처럼 사라지면 주가는 여지없이 폭락했다. 그리고 정경유착을 당연시하는 잘못된 인식으로 적지 않은 사람이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정치테마주 띄우기는 마치 연례행사처럼 또다시 되풀이될 개연성이 있다. 정 전 회장 말대로 정치테마를 내세운 작전세력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만드는 건 투자자의 건전한 상식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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