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칼을 잡지 않는다. 화가 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편치 않을 때 요리를 하면 자신이 만지는 칼에 독이 밴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산책을 하거나 음식점 마당의 대나무를 보며 평상심을 찾는다. 주방에 들어설 때는 언제나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요리할 준비가 됐는지를 묻는다. 정성이 깃든 음식 맛이 다르다는 것을 손님들은 모르지만 그는 안다. 이런 음식철학이 그를 최고의 ‘셰프’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광주 서구 농성동에서 일식집 ‘가매’를 운영하는 안유성 씨(43)는 ‘초밥의 달인’이다. 그는 4년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초밥 최강 달인 3인 중 한 명으로 뽑혔다. 한 명은 서울과 도쿄, 홍콩에서 일식집을 운영하는 일본인, 나머지 한 명은 서울 강남에서 활동하는 요리사다. 안 씨는 당시 벌교 참꼬막, 3년 된 묵은 김치, 나주 생고기 등으로 초밥을 만들어 선보였다. 심사위원들은 “남도의 향기가 듬뿍 담긴 초밥”이라고 극찬했다. 그는 지난해 4월 서울 서초구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린 ‘국제요리경연대회’에서 이른바 ‘남도식 초밥’으로 대상을 받기도 했다.
안 씨가 요리사의 길로 들어선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안 씨의 어머니는 전남 나주에서 20년 가까이 ‘장수회관’이란 한식집을 운영했다. 어릴 적부터 음식의 매력에 푹 빠진 그는 고교 졸업 후 상경해 일식집에서 주방 보조 일을 하면서 요리를 배웠다. 그때 인생의 멘토이자 스승인 김영주 씨(63)를 만났다. 김 씨는 1980년대 신라호텔 일식당 주방장을 하면서 삼성그룹 고 이병철 회장을 모셨던 요리사였다.
“일본 요리를 배우면서 일본 초밥의 매력에 푹 빠졌어요. 그래서 본고장에 가서 그 비법을 배워 보고 싶었죠.” 1995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니가타 요리학교를 다녔다. 과연 일본의 스시(壽司)는 달랐다. 스시용 생선을 써는 방법이 무려 12가지나 됐다. 손으로 밥알을 쥐는 방법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는 것도 알았다. “그동안 초밥을 빨리 만드는 사람이 고수인줄만 알았는데…. 밥 안에 일정한 공기층을 만들어줘야 식감이 좋아진다는 것을 그때 배웠어요. 한마디로 신선한 충격이었죠.”
최강 달인답게 안 씨가 만든 초밥은 맛과 모양, 무게가 기계로 찍어낸 듯 일정하다. 저녁용(15g)은 밥알이 320개, 점심용(18g)은 350개다. 안 씨는 “밥알 수는 거의 틀리지 않는다. 아마도 20년 내공 때문인 것 같다”며 웃었다.
그는 일본에서 배운 기술에다 스스로 터득한 비법을 접목해 그만의 초밥을 만들었다. 그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밥과 재료가 조화를 이루도록 ‘궁합’을 맞추는 것이다. 초밥은 어느 한쪽의 맛이 강하지 않고 씹는 질감을 잘 살려야 한다. 전복과 학꽁치를 재료로 할 때는 비린 맛을 없애기 위해 망고나 생강을 넣는다. 방어나 참치 뱃살에는 단맛이 나는 하얀 대파를 잘게 썰어 넣는다. 생선의 숙성도 맛을 좌우하기 때문에 무척 신경을 쓴다. 광어는 다시마로 숙성을 시킨다. 다시마에 배어 있는 핵산 성분이 광어에 스며들면 감칠맛이 나기 때문이다.
새로운 초밥을 개발하는 데도 열성이다. 최근에 선보인 아귀간 초밥이 인기다. 흐물흐물한 아귀의 간을 소금으로 간한 뒤 쪄서 초밥으로 만들었는데 구수한 맛이 일품이다. 오이를 잘라 띠를 두른 매생이굴초밥도 색다른 맛이 난다. 지금까지 개발한 초밥은 100여 가지로 이 중 손님의 반응이 좋은 25가지를 상에 올린다.
그는 ‘대통령의 요리사’로도 유명하다. 17년 전 광주로 내려와 무등산관광호텔 조리장을 하던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이 광주에 머물 때는 직접 만든 초밥과 홍어, 굴비 요리를 대접했다. 김 전 대통령은 안 씨가 만든 초밥을 청와대까지 가져가 먹을 정도로 안 씨의 음식을 즐겼다. 이희호 여사도 그때 맛을 못 잊어 3년 전 ‘가매’를 찾았다. 그가 초밥과 짱뚱어탕을 대접하자 “너무 맛있다”며 그의 손을 잡았다.
‘가매’는 4년 전 식당을 리모델링하면서 통로 벽면 공간을 갤러리로 꾸몄다. 그는 외지 손님에게 음식과 그림이 만나는 ‘예향(藝鄕) 광주’의 멋을 보여주고 싶었다. 비용이나 공간 문제 때문에 전시회를 열지 못하는 지역 작가들을 돕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지금까지 가매에서 전시회를 연 작가는 50명이 넘는다. 안 씨는 “작가들이 다른 갤러리보다 작품이 더 잘 팔린다며 좋아한다”고 말했다.
20년 넘게 음식을 만들어 온 그에게 요리란 무엇일까. “2년 전 60대 중반의 단골손님이 암 투병 중에 초밥이 먹고 싶다며 가족과 함께 왔어요. 파리한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고 느꼈어요. ‘아! 음식 하나로도 누군가에게 행복감을 줄 수 있구나.’ 손끝의 감각보다는 마음으로 만드는 게 바로 요리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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