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시장 개방으로 경쟁이 심화된다는 회의적인 시각을 갖기보다는 장점이 더 많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법률서비스는 수출이 중요한가요, 수입이 중요한가요. 다른 나라의 시장에 접근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게 더 많지 않을까요. 이런 도전과제를 포용하고, 적응하지 않는다면 결국 더 많은 혜택을 놓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홍콩도 2004년 발효된 중국과의 경제협력동반자협정(CEPA)을 통해 중국 법률시장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10월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변협회관 18층에서 열린 대한변협 초청 엘시 렁(Elsie Leung) 홍콩 전 법무부총리의 강연. 그는 ‘법률시장 개방, 홍콩은 이렇게 대처했다’라는 주제 강연에서 한국이 법률시장 개방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것을 주문했다.
한국 법률시장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한국은 미국 및 유럽과의 자유무역협정(FTA)에 서명함으로써 국내 법률시장의 빗장을 단계적으로 열기로 했다. FTA 개방계획서인 양허안에 따라 외국 로펌이 국내 로펌과 공동으로 사건을 처리하고, 수익을 나누는 2단계 개방은 이미 일부 진행되고 있다. 유럽과는 지난해 7월 1일부터 시행됐고, 미국은 올해 3월 15일 예정돼 있다. 2단계부터는 외국 로펌이 사실상 수익 활동을 할 수 있어 외국 로펌의 국내 법률시장 내 입지가 크게 증가할 수 있다.
한국 로펌과 지분을 투자한 합작기업(joint venture) 설립이 가능한 3단계 개방은 유럽에는 2016년 7월 1일, 미국에는 2017년 3월 15일로 예정돼 있다. 3단계 개방이 되면 외국 로펌이 세운 합작기업이 국내 변호사를 고용할 수도 있다. 사실상 ‘완전개방’에 가까운 법률시장의 빅뱅이 2, 3년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법률시장 패러다임 바꾸면 2020년까지 수출 3조4000억 원 늘어”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2년 법률서비스 무역수지 적자가 6억 달러를 넘어섰고, 지난해에는 7억 달러(약 7500억 원)를 처음으로 초과했다. 이 같은 만성적인 적자 추세가 지속된다면 2017년에는 적자 규모가 1조 원 안팎이 될 것이라는 부정적인 전망도 나온다. 법률시장 개방에 비관적인 목소리가 벌써부터 커지는 이유다.
그러나 홍콩의 사례처럼 법률시장 개방에 적극적으로 대처한다면 한국 법률시장의 운명이 바뀔 수 있다는 ‘역발상’도 있다. 규제를 풀고 시장개방을 철저히 준비하면 법률시장이 무역수지 흑자의 ‘효자 종목’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경제연구원 최남석 부연구위원은 지난해 6월 ‘규제연구’라는 학술지에 ‘법률서비스 시장개방과 규제개혁의 경제적 효과 분석’이라는 논문을 실었다. 법률서비스의 무역수지 전망을 회귀분석으로 수치화한 첫 논문이다.
이 논문에 따르면 법률서비스 산업의 규제개혁과 제도개선이 ‘빅뱅’ 수준으로 이뤄진다면 현재 7억 달러 수준인 법률서비스의 해외수출이 2020년 7배 수준인 50억 달러로 증가한다. 2020년까지 누적 수출액이 현재보다 3조4000억 원 늘고, 양질의 일자리 4만3000개가 창출된다. 법률서비스의 수출 확대는 전체 산업에 대해 약 3조2000억 원의 부가가치까지 유발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최 부연구위원은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국내 법률시장이 포화상태고, 태생적인 문제점이 있는 데도 ‘법률서비스=내수시장’이라는 인식이 바뀌지 않고 있다”면서 “패러다임 시프트 수준으로 국내 법률서비스 산업을 제조업과 함께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국내 로펌의 전문화·조직화·대형화를 통한 경쟁력 제고 △해외 진출 기업과 연계한 수출 서비스 증대 △법조 인력의 국제화와 해외고용의 확대 등을 전제조건으로 제시했다. 그는 싱가포르의 법률시장 개방에서 배울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싱가포르는 2000년 시장을 전면 개방했는데 당초 우려와 달리 싱가포르 로펌이 외국 로펌에 잠식되지 않고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글로벌 톱5 중 3곳, 100대 로펌 중 16곳 이미 한국 시장에 진입
법률시장 3단계 개방이 이뤄진 직후인 2017년 국내 최고 대기업 ‘가’ 회사가 미국의 또 다른 글로벌 기업 ‘A’ 회사와 초대형 합병을 한다고 가정하자. 양 회사는 합병절차를 한국 법에 따르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합병 과정에서 법률자문을 국내 로펌이 아닌 외국 로펌에 맡긴다면 어떻게 될까. 국내 로펌엔 최악의 시나리오다. 한국보다 앞서 법률시장을 개방한 독일에 비슷한 일이 실제로 있었다.
독일의 자동차 회사 다임러벤츠사가 독일 법률시장 개방 원년인 1998년 미국 자동차회사 크라이슬러와 합병할 때의 일이다. 법률 자문료만 920억 달러인 대규모 합병인데 벤츠사는 독일 로펌 대신 미국의 세계적인 로펌 셔먼 앤 스털링(Shearman & Sterling)을 선택했다. 독일 법에 따라 진행된 합병 절차에 독일 로펌이 배제된 것은 독일 법률시장의 위축을 불러온 상징적인 사례로 자주 거론된다.
한국 법률시장에는 2012년 8월 로펌의 국내 사무소가 처음 문을 열었다. 올해 2월 말 기준으로 법무부로부터 외국법자문법률사무소 설립인가를 받은 외국 로펌은 모두 18곳으로 이 중 16곳이 세계 100대 로펌이다.
미국 로펌은 베이커 앤드 맥킨지(Baker & McKenzie), 클리어리 가틀립 스틴 앤 해밀턴(Cleary Gottlieb Steen & Hamilton), 케이앤엘 게이츠(K&L Gates) 등 14곳이며, 영국 로펌은 디엘에이 파이퍼(DLA Piper), 클리포드 챈스(Clifford Chance), 링크레이터스(Linklaters) 등 4곳이다. 외국법 자문사로 등록한 변호사는 모두 64명인데, 미국변호사는 52명, 영국변호사는 12명이다.
▼ 로펌, 합병-해외진출 활발… 전문화된 국제통상팀 조세수사팀 신설도 ▼
디엘에이 파이퍼와 베이커 앤드 매켄지는 지난해 10월 ‘American Lawyer’가 매출액 기준으로 집계한 세계 1, 2위 로펌이다. 둘 다 고용변호사가 4000명이 넘고, 매출액이 24억 달러(약 2조5000억 원)를 웃돈다. 변호사는 국내 대형 로펌의 10배 가까이 되고, 매출액은 국내 법률시장의 전체 규모와 맞먹는다.
세계 5위인 클리퍼드 챈스도 변호사가 2500여 명, 매출액도 20억 달러가 넘는다. 클리퍼드 챈스는 2012년 7월 국내에 입성한지 두 달 만에 국내 대기업 간 거래 등 23억5000만 달러 규모의 한국 자본시장 거래 4건을 자문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세계 30위인 미국의 롭스 앤드 그레이는 특허전문으로 미국 법정에서 진행되는 한국 기업의 특허소송을 매년 100건가량 진행하고 있다. 현대·기아자동차, LG, 현대중공업 등 한국 대기업에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코헨 앤드 그레서는 전체 변호사가 50여 명인 부티크 로펌으로 100대 로펌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LG전자, KCC, SK 등 다수의 한국 기업들이 주요 고객이다. 세계 10위 이내의 미국계 로펌이 현재 법무부에 설립인가 신청을 해둔 상태다.
최영익 대한변협 국제이사는 “외국 로펌은 한국 기업의 해외 기업활동이나 분쟁을 주로 맡는데, 기존에도 담당해왔던 분야여서 아직은 영향력이 제한적”이라며 “오히려 외국 로펌이 경쟁하면서 국내 기업이 어느 정도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다”고 평가했다. 문재완 한국외국어대 로스쿨 교수도 “외국 로펌의 국내 진출은 예상보다 많지만 업무가 제한적인 측면이 있어 아직 국내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다”면서 “현재 시장 상황에서 외국 로펌의 영업이익은 적자지만 장래를 보고 활동 중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외국과의 경쟁 통해 법률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 마련해야”
국내 로펌은 위기의식이 커지면서 생존전략을 마련하기 위한 움직임도 분주하다. 본격적인 시장개방에 대비해 로펌 간 인수합병으로 몸집을 불리고, 해외진출에 나서며 전문성을 강화하고 있다. 우선 국내 로펌의 해외진출이 2002년 이후 꾸준히 늘고 있다. 동아일보가 자체 조사한 결과 지난해 11월 기준으로 국내 13개 로펌이 13개국 43곳의 도시에 사무소를 두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나라별로는 중국이 베이징 7곳과 상하이 4곳, 칭다오 1곳 등 12곳으로 가장 많았고, 베트남이 호찌민 5곳, 하노이 4곳 등 9곳으로 그 뒤를 이었다. 미국은 뉴욕 한곳, 영국은 한 곳도 없었다. 국내 로펌은 국내 기업의 해외투자가 상대적으로 활발하고, 영미계 로펌의 진출이 더딘 곳을 집중 공략한 것이다.
국내 법률시장 매출액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김앤장 법률사무소는 국내 법률시장의 방파제 역할을 하면서 ‘아시아 법률시장의 허브’로 불리는 홍콩에 법률사무소를 마련해 글로벌 로펌으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다. 내부적으로도 법률 서비스의 질 향상과 전문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세종은 중국에 2곳의 법률사무소를 두고 일찌감치 국제화에 대비했고, 최근에는 전담팀을 구성해 법률시장 개방에 대비하고 있다. 화우는 국제통상 분야만 전문적으로 맡는 팀을 신설했고, 국내 로펌 중 판검사 출신 변호사 구성비율이 70%로 가장 높은 바른은 로펌 중 유일하게 ‘조세수사팀’을 운용하는 등 전문화에 집중하고 있다. 법무법인 광장도 분야별 전문성 강화를 위해 투자를 늘리고 있다. 문 교수는 “한국의 법률시장 개방계획이 비교적 보수적으로 짜여 있고, 법률시장 개방 준비도 잘 진행되고 있다”면서 “기존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고 말했다.
법무부는 올해 외국법자문사법 개정위원회를 운영해 2, 3년 뒤로 다가온 법률시장 3단계 개방을 위한 관련 법 개정을 할 예정이다. FTA 양허안에 따라 합작회사의 외국자본 지분율이나 특정업무 제한 등은 국내법으로 정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법 개정 방향에 따라 법률시장의 개방 폭이 최종 결정된다. 법 개정을 앞두고, 벌써부터 국내외 로펌과 변호사 단체 등이 다양한 의견을 내놓으면서 물밑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보다 먼저 법률시장을 개방한 해외 사례를 타산지석 삼아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프랑스는 성급하게 법률시장을 전면 개방했다가 국내 로펌이 큰 타격을 입었고, 뒤늦게 외국 로펌의 일부 업무를 금지했다. 독일도 법률시장 전면 개방 후 덩치가 작은 독일 로펌이 영미계 로펌에 인수 합병되면서 대형 인수합병 자문 역할을 외국 로펌에 빼앗겼다. 반면 일본은 18년 동안 점진적으로 법률시장을 개방해 일본 로펌 중심으로 일본법 관련 업무를 전문화하면서 동시에 대형화까지 이뤘다. ‘아시아 법률 허브’를 목표로 세운 싱가포르는 적극적인 법률시장 개방에 나서면서도 동업을 제한하는 조심스러운 접근법을 선택했다.
신희택 서울대 로스쿨 교수는 “법률시장 개방의 효과를 살리면서도 국내 로펌이 너무 위축되거나 외국 로펌에 휘둘리지 않도록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면서 “자칫하면 국내 법률시장의 주도권이 ‘가나다’ 로펌에서 ‘ABC’ 로펌으로 바뀔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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