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근 씨는 문구점에 진열된 마론 인형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금발에 날씬한 몸매, 커다란 눈에 화려한 원피스 차림. 2007년 성탄절을 보름 앞두고 이 씨는 리본으로 포장된 마론 인형 선물상자를 들고 동네 문구점을 나섰다. 딸 혜진이(당시 11세)가 며칠 동안 “사줘, 사줘” 노래를 부르던 마론 인형이었다. 이 씨는 집에 가자마자 선물을 건네고 싶었지만 딸에게 ‘깜짝 선물’로 주기 위해 참았다. 선물을 받고 기뻐할 딸 모습을 생각하며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늦둥이로 얻은 딸은 애교가 넘쳤다. 매일 휴대전화에 딸 이름이 적어도 열 번은 떴다. 인쇄소를 다니던 이 씨는 한창 바쁜 중에도 휴대전화에 뜬 딸 이름은 외면하지 못했다. 전화를 받을 때마다 수화기 너머에서 “아빠, 뭐해? 아빠, 어디?” 딸이 큰 소리로 물었다. “응! 우리 딸! 아빠 일해요!” 이 씨는 인쇄기 돌아가는 소음에 목소리가 묻힐까 봐 소리치듯 대답했다. 퇴근 후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조급하고 행복했다.
12월 25일 성탄절. 혜진이는 교회를 다녀오던 길에 납치를 당했다. 실종 77일째인 2008년 3월 11일 혜진이는 훼손된 시신으로 발견됐다. 범인은 2009년 2월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딸의 장례를 치른 뒤에도 이 씨는 마론 인형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남은 가족들은 이 씨가 품에 마론 인형을 안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딸을 위해 준비했던 성탄절 선물이 딸의 유품이 됐다. 그렇게 오랫동안 마론 인형을 품고 다녔다. 집에 있을 때면 마론 인형을 앞에 앉혀 놓고 쪼그려 앉아 한참을 들여다봤다. 가족들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딸을 잃은 지 약 6년 2개월 뒤인 3일, 이 씨는 자택에서 숨졌다. 주변 사람들은 “이 씨가 혜진이를 잃고 술에 의지해 살았다”고 말했고 경찰은 급성 심근경색을 사인(死因)으로 추정했다.
5일 오후 2시 반. 이 씨의 유골은 경기 수원시 연화장에서 화장된 뒤 안양 청계공원 묘지에 묻혔다. 이 씨가 묻힌 자리에서 오른쪽으로 세 번째 묘. 딸 혜진이가 묻힌 자리다.
‘고 이혜진의 묘, 1997.12.18∼2008.3.11, 부 이창근…, 못다 이룬 꿈 하늘나라에서 마음껏 펼치거라.’
이 씨의 묘비는 이름, 생년, 사망일자 등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상태였다. 청계공원 묘지에는 가족 친척 등 20여 명이 참석했다. 그중 누구도 마론 인형의 행방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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