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돌고 돈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돌며 질그릇(옹기)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숨구멍을 뚫어놓으면 집어삼킬 듯이 더욱 강한 기세로 가마 속을 달군다. 그 불을 사흘 낮, 사흘 밤 지켜본다. 한순간이라도 놓치면 불은 미친 듯이 날뛰기 때문이다. 불길이 서서히 넓혀지며 1200도의 절정에 이르도록 달래야 한다. 잡념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오로지 불길에 신경이 곤두선다. 정점을 찍고 난 불길을 쉽게 바람과 마주하게 해서도 안 된다. 서서히 열기를 식히며 새로운 탄생을 기다려야 한다.
○ 제주의 마지막 굴대장
제주전통옹기의 명맥을 잇는 김정근 씨(43)를 18일 서귀포시 대정읍 제주옹기박물관에서 만났다. 그는 옹기 제작의 대미를 장식하는 불 때기의 중요성을 침이 마르도록 강조했다. 김 씨는 “제주옹기를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들려면 흙부터 시작해서 성형, 돌 가마, 땔감 등 여러 요소가 맞아떨어져야 하지만 마지막 불을 잡지 못하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제주옹기는 전통적으로 철저한 분업에 의해 이뤄졌다. 가마(제주에서는 ‘굴’이라고 부른다)를 만드는 굴대장, 흙을 선별하고 고르는 질대장, 옹기 성형기능을 가진 도공장, 옹기를 굽는 불대장 등으로 나뉜다. 김 씨는 제주의 마지막 현역 굴대장인 고홍수 씨(2012년 사망)의 뒤를 이은 유일한 전수조교다. 이들 도공은 제주도 옹기장(제주도 무형문화재 제14호)으로 불리는데 도공장, 불대장도 지난해 세상을 떠나면서 그 역할을 김 씨가 맡았다.
운명이 바뀐 것일까, 아니면 운명을 찾은 것일까. 2001년쯤 김 씨가 대정읍의 한 도예촌에 놀러갔을 때였다. 옹기를 만들던 사람이 “한번 해 볼래”라고 권유하자, 그는 바로 달려들었다. 그는 “그냥 그 자리에서 해보겠다고 했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가족사를 들여다보면 이해가 된다. 작고한 아버지가 옹기를 만들었고 할머니는 옹기장사를 했었다. 그의 몸에 제주옹기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생계를 위해 3일은 화물차를 운전하며 전국을 누비고 3일 정도는 옹기작업에 참여했다. 허드렛일을 하면서 옹기에 눈을 떠가고 있을 즈음 2007년 처음으로 직접 ‘굴박기’(가마를 축조하는 일)를 했다.
제주옹기를 만드는 가마는 돌로 만들어진다. 육지의 흙벽돌과 다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가마에 쓰는 돌은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이다. 깎아서 쓰면 불길에 깨지기 때문에 자연형태 그대로 써야 한다. 아치형태를 만들기 위한 돌은 구하기 어려워 제주 곳곳을 누비고 다녀야 한다.
돌 가마는 크게 1000도 내외의 ‘검은굴’(길이 5∼6m, 폭 1.5m)과 1200도까지 오르는 ‘노랑굴’(길이 15m, 폭 1.7m)로 나뉜다. 보통 옹기는 1000도의 온도에서 단 한 차례 굽는다. 자기(瓷器)는 낮은 온도에서 초벌구이를 한 뒤 1200도의 높은 온도에서 다시 구워낸다. 제주옹기는 초벌구이라는 점에서 다른 지역 옹기와 같지만 1200도의 온도에서 굽는 점은 자기와 비슷하다. 제주 흙은 철 성분이 많아 높은 온도에서 굽는 옹기는 표면에 유약을 바른 것처럼 빛이 난다. 모양은 투박하지만 정감이 깃든 짙은 갈색이다.
제주옹기에 쓰이는 흙은 화산회토가 아니라 오랜 세월 지하암반 속을 흘러내리며 퇴적된 흙이다. 육지 흙에 비해 점성이 아주 강해 물과 비율을 제대로 맞춰야 한다. 지금까지 도자기 전문가들이 “제주 흙은 나빠서 못 쓴다”고 말했던 것은 흙의 성질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 아들에게도 대물림할 터
제주옹기는 1970년대 사라졌다가 제주전통옹기전승보존회 등 젊은 후예들이 나서면서 1990년 후반부터 다시 명맥을 잇기 시작했다. 그 중심축에 김 씨가 있다. 그는 “과거 제주사람들은 부엌살림을 비롯한 생활용품은 물론이고 고기잡이 도구와 벼루, 장난감도 만들었다”며 “전통을 이어가는 한편 옹기제품의 산업화에도 눈을 돌리고 싶다”고 말했다.
김 씨는 현재 돌 가마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초등 4학년인 그의 쌍둥이 아들이 옹기제작장을 놀이터 삼아 다니며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물레를 돌린다. 힘들어도 옹기전통을 대물림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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