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앳된 얼굴의 박상원(가명·18) 군이 주섬주섬 짐을 챙긴 뒤 건물을 나섰다.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자란 이곳에서 퇴소하는 날이다. 법적으로 만 18세가 되면 입소자들은 시설에서 나와야 한다. 고교 및 대학에 다니거나 직업훈련을 받는 등 예외적인 경우에만 계속 머물 수 있다.
박 군은 2월 특성화고교를 졸업하면서 대학 진학 대신에 취업을 했기 때문에 올해 퇴소해야만 했다. 정부에서는 퇴소자들에게 자립지원정착금으로 300만 원을 지급했다. “원룸 보증금만 500만 원인데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싶더라고요….” ○ 홀로 설 수 없는 홀로서기
평범한 사람들은 대학에 진학하거나 취업했을 때, 아니면 결혼할 때 집을 구한다. 이때 부모의 도움을 얻는다. 그들에게 집을 구한다는 건 독립이고 새 출발이기 때문에 설레는 일이다. 하지만 박 군에겐 아무도 없는 벌판에 혼자 내몰리는 것을 의미했다. 두려웠다.
박 군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동복지시설에 입소했다. 부모님 이혼 후 어머니와는 연락이 끊겼고 아버지는 정신질환으로 박 군을 돌볼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도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더라면….’ 이런 생각을 할 때면 눈물이 흘렀다.
그래도 박 군은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이 살았다. 지난해 말엔 원하던 직장에도 들어갔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싼 원룸을 얻으려 해도 보증금만 500만 원, 월세 30만 원 남짓은 되기 때문이다. 보증금을 낮춘다면 월세를 올려야 한다. 그의 초봉은 월 120만 원 수준. 10만 원도 너무 큰돈이라 월세를 올릴 수도 없었다.
박 군은 몇 년 전부터 ‘디딤씨앗통장’이란 걸 만들어 돈을 조금씩 모아왔다. 저소득층 아동이 후원자의 도움으로 저금하면 정부가 금액을 일대일로 매칭해 월 3만 원 내에서 적립해주는 통장이다. 하지만 이 돈과 정착금을 모두 합해도 수중엔 500만 원이 채 남지 않았다.
돈이 들어갈 곳은 태산이었다.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만큼 정장, 구두, 가방, 여행용 트렁크, 노트북컴퓨터와 수건, 로션 등 생필품을 사는 데만 150만 원이 넘게 들었다.
그는 퇴소 직후 신입사원 연수원에 들어가 한 달간 교육을 받았다. 교육이 끝나고 근무지 발령을 기다리는 동안 계속 걱정에 시달렸다. 집을 마련할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저렴하게 집을 구할 방법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소년소녀가정 등 전세주택지원’ 대상자로 선정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원하려면 일단 스스로 주택을 구해야 한다. 그는 근무지가 결정되면 전세주택을 신청하고, 결과를 기다릴 때까지는 고시원에서 지낼 계획이었다.
지난달 말 그는 지방의 한 사무소에 발령을 받았다. 마땅히 지낼 곳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자 딱한 소식을 접한 상사가 관사에서 지낼 수 있게 배려해줬다. 사실 관사는 이미 정원이 꽉 차서 자리가 없는 상태였다. 그는 결국 다른 직원이 쓰고 있는 1인실에 들어가 같이 생활하고 있다. 비좁긴 하지만 이곳에서 지내면 한 달에 식비만 10만 원 정도 내면 된다. “저는 힘든 상황이지만 앞으로 퇴소할 동생들은 이런 일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일부는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자립지원정착금은 지자체의 사정에 따라 제각각이다. 강원의 한 아동복지시설에서 2009년 퇴소한 김정수(가명·26) 씨는 당시 자립지원정착금으로 100만 원만 받고 시설에서 나왔다. 이 돈으로는 월세방조차 얻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주거를 해결하려고 기숙사가 있는 리조트에 계약직으로 취직했다.
당시 월 급여는 약 120만 원. 식사는 기숙사 식당에서 해결했다. 교통비와 집값이 들지 않아 조금씩 저축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리조트에서 식음료 분야를 아웃소싱업체에 맡겨 더는 기숙사에 머물 수 없게 됐고 결국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20만 원의 원룸을 얻고 나니 통장 잔액은 바닥이었다.
퇴소 후 사회에 정착하지 못한 경우엔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지난해 경남의 한 아동복지시설에서 퇴소한 장희정(가명·19·여) 씨는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두세 달 월세가 밀리면서 생활고에 시달렸다. 취업도 해봤지만 동료들과의 갈등으로 몇 달을 버티지 못했다. 오갈 데가 없어진 장 씨는 가출 청소년들이 지내는 쉼터를 찾았고, 얼마 가지 않아 그곳에서 사귄 친구들과 종적을 감췄다. 그가 자란 시설 관계자는 “간간이 친구들을 통해 소식을 듣는데, 나쁜 길로 빠져들어 생계를 잇고 있다고만 전해 들었다”며 “ 여자아이들은 성매매로 빠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말했다.
퇴소자들에겐 또 다른 걱정이 있다.
아동복지시설에 머물 땐 ‘의료급여 수급자’로 분류돼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항목은 병원비를 거의 내지 않는다. 하지만 시설을 퇴소하는 순간 이 혜택은 사라진다. 퇴소한 뒤 몸이라도 아프면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된다. 경남의 한 아동복지시설에서 2009년 퇴소한 한종원(가명·29) 씨는 “시설에서 나온 뒤에는 아파도 병원을 가지 않았다. 병원비가 많이 나올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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