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운항중엔 ‘무승인 결제’… 3~5일후 전표 처리까지 사기 몰라
면세품 1억8000만원어치 구입후… 남대문 수입상가에 되판 일당 적발
‘애플 아이패드 미니 16G(40만 원), 시슬리 안티에이징 크림(33만 원), SK-II 스템 파워 크림(24만 원)….’
지난해 8월 31일 일본 나리타에서 인천으로 향하는 항공기에 오른 설모 씨(31)는 고가 가전제품과 화장품을 줄줄이 주문했다. 그는 이들 제품 값 150만 원을 신용카드로 결제했다. 설 씨는 인천공항에 도착해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든 채 사라졌다. 하지만 설 씨는 금융채무 불이행자(옛 신용불량자)였고, 항공기에서 결제한 신용카드는 이미 정지된 상태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경찰 및 금융당국에 따르면 운항 중인 항공기 내에서는 일반 카드 가맹점과 달리 실시간 결제 승인이 이뤄지는 단말기 회선을 사용할 수 없다. 이 때문에 항공사는 승객의 카드 전표를 착륙 후 카드사에 보내는 ‘무승인 결제’ 방식으로 면세품을 판매한다. 문제는 카드가 정지되거나 이용 한도를 초과한 상태여도 매출 전표가 처리되는 3∼5일 후에야 알 수 있다는 것. 설 씨처럼 카드대금을 낼 수 없는 금융채무 불이행자에게 이미 물품이 팔린 뒤라면 손해는 카드사가 떠안아야 한다.
조모 씨(37)는 지난해 8∼10월 설 씨 등 금융채무 불이행자들을 아르바이트생으로 고용한 뒤 기내 면세품 1억8000만 원어치를 구입하게 한 뒤 남대문 수입상가에 되팔았다. 7일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여신전문금융업법 위반 및 사기 혐의로 조 씨를 구속하고 설 씨 등 10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사기 수법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03년경. 항공사와 카드사는 이런 맹점을 악용한 범죄를 막기 위해 금융채무 불이행자 명의의 신용카드 리스트를 기내 결제 시스템에 사전 입력하도록 하고 있다. 카드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결제 시스템을 장착하는 데에는 항공기 1대당 수억 원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량 고객 리스트가 카드사와 항공사 사이에 실시간으로 공유되지 않는 데다 항공사가 ‘승객 불편’을 핑계로 확인을 소홀히 해 효과가 작다. 실제로 설 씨는 41일 동안 21차례나 일본을 왕복하며 정지된 신용카드로 면세품 5400만 원어치를 결제했지만 단 한 번도 적발되지 않았다. 또 불량 카드 사용의 책임을 항공사 대신 카드사들이 전부 떠안는 구조도 문제 해결에 걸림돌이라는 지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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