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사는 공소장으로 말하고, 판사는 판결문으로 말하라’는 법조계의 불문율이 있다. 법정에서 재판장이 사건 당사자를 백 마디 말로
설득하는 것보다 당사자들이 승복할 수 있게 판결문에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담아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재판 결과를 받아든
당사자들은 판결문의 한 글자 한 글자로 인해 인생이 뒤바뀌기도 한다. 》
[줄줄줄 늘어지고] 한 문장이 820자… 읽다가 숨 넘어갈 판
그런데 정작 판결문을 읽고 나면 당사자들은 어려움을 호소한다. 법률용어가 가득한 판결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워서다. 최근 토지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서울중앙지법에서 민사사건 1심 판결이 나온 김모 씨(42·자영업)는 “판결문에 적힌 내용이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서 애먹었다. 내가 이겼다는 건지, 졌다는 건지 변호사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알게 됐다”고 푸념했다.
민법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 중 ‘경락(競落)’이라는 단어가 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경락’은 우리가 흔히 쓰는 한의학적 치료 방법을 일컫는 말과 ‘경매에 의해 동산이나 부동산의 소유권을 취득하는 일’을 뜻하는 법률 용어로 나뉜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법률용어보다 한의학적 용어를 먼저 떠올리게 마련이다. 훨씬 자주 쓰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비록 판결문에서 법률적으로 명확하게 뜻을 가릴 필요가 있다지만 지나치게 법률에 경도된 표현을 쓰는 건 최근 국민과의 소통을 강조하는 사법부의 방침과도 어긋난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법원 종합법률정보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된 판결문을 살펴보더라도 최근까지 어려운 표현이 쓰인 판결문이 적지 않다. 올해 2월 선고된 민사소송 대법원 판결문 한 건을 예로 들면 200자 원고지 약 17장 분량의 전체 판결문에서 하급심 판결 내용을 요약해 놓은 부분이 한 문장으로 표현돼 있다.
문제는 이 한 문장이 지나치게 길다는 점이다. 한 문장이 820자나 돼 한 페이지를 빽빽하게 채울 정도다. 200자 원고지로 따지면 한 문장이 4장을 넘는 셈이다. 수년 전 한 민사소송의 대법원 판결문에서 한 문장의 글자 수가 2547자나 됐던 적이 있었던 것에 비하면 나아진 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지나치게 긴 문장은 국민들이 판결문을 어렵고 복잡하게 느끼는 이유 중 하나다. [옛날식 표현 그대로]불상의 방법으로 기망해 경락을 경료했다?
판결문을 쉽게 쓰려고만 하다 보면 전문성을 떨어뜨릴 수 있고 판결의 의미를 정확히 담을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하지만 관행적으로 과거에 썼던 표현을 그대로 답습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예를 들어 형사사건 판결문과 논문집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 중 ‘권형성’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어떤 행위가 정당방위로 인정받기 위한 조건 중 하나로 ‘보호법익과 침해법익의 권형성’을 거론할 때 자주 나온다. 사실 ‘권형성’이라는 말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등장하지 않는 말이다.
종합법률정보에 따르면 권형성이라는 표현이 처음 쓰인 판결문은 1987년 대구고법에서 선고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이다. 이후 2007년까지도 기계적으로 형사사건 판결문에 권형성이라는 표현이 종종 쓰였다. 하지만 몇 년 전 대법원의 한 재판연구관이 당시 손으로 썼던 판결문을 찾아본 결과 ‘균형성’이라는 표현을 흘려 쓴 걸 확인하고 그 뒤부터는 권형성이라는 표현 대신 균형성으로 바로잡아 쓰고 있다. 사건 한 건의 판결문을 쓰기 위해 며칠 밤을 새우는 법관들이 수두룩하지만 한편으론 이렇게 별 고민 없이 잘못된 표현을 답습하는 법관도 분명 있었다.
‘불상(不詳)’이라는 표현도 형사사건 판결문에 흔히 나오는 말이다. ‘불상의 방법으로 기망해 경락을 경료했다’는 말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속여 매각을 마쳤다’는 뜻과 같다. 비록 법률적 용어를 정확히 사용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지나치게 법률용어만을 고집하는 건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온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부에서 근무했던 한 부장판사는 “사실 판결문을 짧게 쓰려면 치밀한 논리를 펼쳐야 해서 길게 쓰는 것보다 짧게 쓰는 게 훨씬 어렵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법관들의 권위주의 때문에 어려운 법률용어만 잔뜩 써놓은 판결문도 존재하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형식적 변론만 거쳐 쓰인 판결문은 당사자를 설득할 수 없다”며 “사법의 최종 수요자인 국민을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민이 우선이다]종 수요자는 국민… 법관들도 “쉽게 쓰자” 공감
현재 사법부는 ‘판결문 작성의 적정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기존에 장황하게 써 왔던 판결문이 가독성을 떨어뜨리고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에서 비롯된 움직임이다. 여기에 이용훈 전 대법원장 시절부터 진행돼 온 공판중심주의가 정착하고 있어 법정에서 심리 시간이 늘어나 기록 위주의 재판에서 진술에 의한 재판으로 변하고 있는 점도 판결문을 짧고 쉽게 쓰자는 움직임의 배경으로 해석된다. 지난해 1월부터 형사판결문을, 내년 1월부터 민사판결문을 공개하기로 해 국민을 위한 판결이 필요하다는 내부적 분석도 판결문 작성의 적정화 추진 이유 중 하나다.
전국 최대 규모 법원인 서울중앙지법 형사법관들은 지난해부터 적극적으로 판결문 짧고 쉽게 쓰기 운동을 펼쳐 가고 있다. 지난해 서울중앙지법 형사법관 77명 전원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응답자 47명 전원이 ‘적정화 방안을 공감한다’고 답했다. 적정화 방안이 제대로 시행되면 업무량이 경감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답한 응답자도 74%나 됐다. 법관회의에서 적정화 방안이 채택되면 동참하겠다고 응답자 전원이 답했다.
법원행정처가 지난해 11월 전국 형사법관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판결문 작성 업무비중이 전체 업무의 40%가 넘는다고 답한 법관이 67.5%에 이르렀다. 판결문 적정화가 필요하다고 공감한 응답자는 97.4%에 이르렀다. 이처럼 사법부 내부에서도 판결문을 쉽고 짧게 써야 한다는 의견이 팽배하다.
법관들은 판결문 적정화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판결문의 분량이 적어지면 불성실한 것으로 비칠 것에 대한 인식 변화’가 가장 우선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수도권의 한 법원장은 “과거 지나치게 짧은 판결문을 두고 사회적으로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어 법관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판결문 분량을 채워야 한다는 인식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라며 “기계적 분량보다 충실한 심리를 통해 당사자가 승복할 수 있는 선에서 합리적인 분량으로 판결문을 작성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법원행정처는 지난해 3월 민사재판리포트를 발간해 전국 법원에 배포했다. 이 밖에도 각급 법원별 연구회를 중심으로 쉽고 간결하게 판결문을 쓸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대법원 관계자는 “올해 안으로 형사판결문을 1심부터 쉽고 간결하게 쓸 수 있도록 구체적 방안을 만들어 예규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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