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원 국무총리의 27일 사의 표명은 예상보다 빨랐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정 총리의 사표 수리를 세월호 사고 수습 뒤로 미뤘다. 조건부 사표 수리로 ‘선(先)수습, 후(後)문책’ 기조를 유지한 것이다.
세월호 사고는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이후 최악의 참사인 데다 명백한 인재(人災)라는 점에서 누군가는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어지는 상황에서 ‘국정 2인자’인 총리 사퇴는 시간문제로 여겨졌다. 사고 수습 과정에서 내각 공백 상태를 장기간 방치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사고 수습 뒤 정 총리의 사퇴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공직사회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일정 부분 잠재우면서 관료사회를 대대적으로 개혁할 시간을 벌었다는 얘기다.
○ 왜 조건부 사표 수리 했나
정 총리가 이날 오전 사의를 표명한 뒤 청와대는 “임면권자인 대통령께서 숙고해서 판단하실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정 총리의 사표를 즉각 수리하면 문책에 앞서 수습이 먼저라는 박 대통령의 기조가 흔들리면서 내각 전체가 동요할 가능성을 차단하려 한 것으로 풀이된다. 결국 청와대는 정 총리가 사의를 표명한 뒤 6시간이 지나 정 총리의 사표를 수리하되 사고 수습 이후에 하겠다는 ‘조건부 수리’ 방침을 밝혔다. 청와대 관계자는 “정 총리가 사고 발생 이후 여러 차례 직간접적으로 사의를 표명했다”며 “27일 공식 사의 표명 이전에 박 대통령과 교감은 있었지만 정 총리의 의지가 더 많이 작용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정 총리는 26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세월호 수습방안을 위한 관계장관회의를 연 뒤 사퇴를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총리실 일부 관계자들은 26일 밤늦게에서야 ‘27일 새벽에 출근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전달받았다고 한다.
정 총리는 사의 표명 직후 총리실 간부들과의 면담에서 “(사표 수리까지는)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지혜를 모으고 지원하는 역할은 충실히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세월호 참사 관련 업무는 정 총리 대신 홍윤식 국무1차장이 진도 현지에서 맡을 것으로 알려졌다.
정 총리의 사표 수리 시점은 세월호 희생자의 시신이 거의 수습되고 선체 인양이 이뤄질 다음 달 중·하순이 유력해 보인다. 새 총리가 지명되더라도 국회 인사청문회 절차 등을 감안하면 새 총리 체제는 6·4지방선거 이후에 출범할 가능성이 크다.
○ 관료 출신 밀려나고 정치권 출신 중용하나
개각의 또 다른 변수는 관료 중심의 청와대와 내각을 전면적으로 쇄신할지 여부다. 이번 사고를 계기로 무사안일한 공무원사회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 만큼 관료 출신을 선호하는 박 대통령의 성향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1기 내각이 박근혜 정부의 국정 로드맵을 짰다면 사고 수습 이후 출범할 2기 내각은 구체적 성과를 내야 하는 상황이다. 기획력이 뛰어난 관료 출신보다는 추진력이 강한 인사들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관료사회를 혁신하고 국민이 체감할 정책성과를 내기 위해 정치권 출신을 많이 중용하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흘러나오는 이유다.
개각 일정은 여권의 주요 포스트 인선과도 맞물려 있다. 핵심 친박(친박근혜)계인 최경환 원내대표의 임기가 다음 달 중순 끝남에 따라 친박계가 국정 전면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같은 달 8일로 예정된 새누리당 원내대표 선거, 6월 초 국회 의장단과 상임위원장단 인선, 7월 14일 열릴 새누리당 전당대회 등을 놓고 여권 핵심 인사들이 어떤 역할을 맡을지 교통정리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정 총리의 사의 표명으로 박 대통령의 인적 쇄신 구상도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 신뢰에 상당한 타격을 입은 박 대통령이 민심 수습과 관료사회 개혁, 국정 성과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어떤 카드를 꺼낼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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