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인지문(동대문)’은 서울 도심에 남은 사실상 마지막 사대문이다. 돈의문(서대문)은 일제 때 헐렸고, 숭례문(남대문)은 허망하게 사라졌다가 최근에야 복원됐다. 숙정문(북대문)이 있지만 풍수지리상의 이유로 항상 닫아놓아 문 구실을 못한 데다 그나마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본래 모습을 간직한 사대문은 이제 동대문뿐이다.
동대문은 1396년(태조 5년)에 건립된 뒤 1453년(단종 1년)에 중수됐고, 1869년(고종 6년)에 개축했다. 이 때문인지 동대문 인근에는 조선시대로부터 출발해 근대 전차와 운동장, 시장의 흔적, 최신식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까지 600년 역사가 함께 겹쳐 있다.
흥인지문의 운명은 기구했다.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흥인지문을 뚫고 한양으로 입성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인조는 삼전도의 치욕을 겪고 난 뒤 이 문을 열고 눈물을 흘리며 환궁했다. “나는 돌로 만든 문임으로 소위 철석간장(鐵石肝腸)이라는 것이지만 그때를 생각하니 철석인들 아니 녹고는 못 견디겠더이다.”(동아일보 1928년 4월 20일자 ‘동대문 팔자타령’)
1899년 전차가 개통되면서 조선 수도의 관문이었던 흥인지문은 전차역으로 전락한다. 일제 강점기엔 전차를 복선화한다고 아예 흥인지문 좌우 성벽을 헐어 버렸다. 서대문처럼 철거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해야 할까. 하지만 살아남은 이유도 기구하다. ‘옛 조선 정벌 당시 한양으로 진격한 승전의 상징이니 남겨 두자’는 게 일제의 논리였다.
동대문은 외적의 침입, 일제 강점기, 6·25전쟁 등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꿋꿋이 제자리를 지켰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옛 사람들은 흥인지문을 ‘동대문(動大門)’이라고도 불렀다. 몸을 움직여 나라의 격변을 예언하는 문이라는 의미였다.
광해군 말년에는 동대문 문루가 북서쪽으로 기울어졌다. 변고의 징조라며 쑥덕거렸는데 과연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반정군은 홍제동에서 기병해 세검정을 거쳐 북서쪽 문인 창의문(북소문)을 통해 들어왔다. 1882년 임오군란 때는 문루가 동남쪽으로 기울어졌다. 난리 당시 명성황후가 동대문을 빠져나가 장호원에 피신했는데 장호원은 동대문의 동남쪽 방향이다.
동대문이 움직인다는 것은 단지 속설만은 아니었다. 1983∼1986년 학자들이 조사해봤더니 해마다 10월이면 동남쪽으로 기울기 시작해 이듬해 봄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문루를 지을 때 수축·팽창률이 다른 목재를 섞어서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늘날 동대문을 떠올리면 흥인지문보다는 청계천 주변 시장이나 DDP, 패션타운을 먼저 떠올리는 이가 많지만 600년 본래 주인도 기억해야 한다. 눈을 크게 뜨고 마음속으로 동대문 주변 높은 건물을 하나씩 지워 가면 고요한 중세 도시 한양이 차츰 눈앞에 보일지 모른다.
서울시의 문화관광해설사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주중과 주말 언제든지 한양도성투어에 참여할 수 있다. 흥인지문 구간은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6·7번 출구에서 출발해 흥인지문∼오간수문 터∼이간수문∼동대문역사문화공원(옛 동대문운동장 터)∼동대문역사관∼광희문∼천주교 신당동교회∼장충체육관 등의 코스. 전체 1.8km 구간으로 약 1시간이면 돌아볼 수 있다.
시가 발간한 한양도성 스토리텔링 북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를 보면 한양도성에 관한 이야기 100가지를 접할 수 있다. 서울스토리 홈페이지(seoulstory.org), 서울시 관광정책과 02-2133-2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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