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테러때 막내 잃은 美부부… 세월호 유족에게 위로 메시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8일 03시 00분


[세월호 참사/어버이날 2제]
“하늘로 떠난 아들의 이름으로, 세상에 봉사하며 살아갑니다”

미국 9·11테러로 아들을 잃은 리즈(왼쪽), 스티브 앨더먼 씨 부부. 리즈 앨더먼 씨 제공
미국 9·11테러로 아들을 잃은 리즈(왼쪽), 스티브 앨더먼 씨 부부. 리즈 앨더먼 씨 제공
"세월호 유가족과 희생자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흐느껴 울었습니다. 전 세계가 함께 아파하고 있다고 꼭 전해 주세요."

5일 오전(현지 시간) 전화기 너머 리즈 앨더먼 씨(73·여)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세월호 참사는 13년 전 9·11테러로 아들 피터를 잃은 고통을 다시 떠오르게 했다. 비통함을 느끼며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앨더먼 씨는 "(아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한동안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조차 괴로웠다"며 "세월호 희생자의 부모들 역시 지금 지옥 같은 고통 속에 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이 시점에 어떤 말이나 위로가 가장 필요할까요?

"자식을 잃은 고통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아요. 방법은 딱 두 가지입니다. 서서히 세상과 격리돼 말라 죽거나 아니면 자식의 이름으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죠. 우리는 아들을 위해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피터 앨더먼
피터 앨더먼
2001년 9·11테러 당시 막내아들 피터는 대학을 졸업하고 블룸버그의 계열사인 블룸버그트레이드북에 입사한 스물다섯의 꿈 많은 청년이었다. 공중 납치된 항공기가 뉴욕 세계무역센터 북쪽 타워를 들이받았던 그날, 피터는 106층에 있었다.

그 때 앨더먼 씨 부부는 프랑스 여행 중이었다. 생사의 기로에 놓인 피터가 가족에게 보낸 마지막 메시지는 워싱턴에 거주하던 누나 제인 씨와 주고받은 문자가 전부였다.

"사방이 온통 연기야. 무서워 누나."(오전 9시 7분)

"빠져나올 수 있겠니, 탈출할 수 있어?"

"아니, 우리 모두 갇혔어."(오전 9시 16분)

그로부터 약 40분 뒤. 무역센터는 화염 속에서 무너져 내렸다. 가족은 피터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테러가 나기 얼마 전 가족끼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우연히 죽은 다음에 화장(火葬)을 할지를 두고 서로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피터만 유일하게 화장을 원치 않았죠. 그랬던 아이가 결국…."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앨더먼 씨는 힘겹게 다시 입을 열었다.

"아들을 잃은 이후 수면제 한 알 복용하는 것도 나만 편해지려는 이기적인 행동 같았습니다. 그래서 치료를 받는 것이나 약을 먹는 것도 한동안 거부했어요."

질식할 것만 같던 고통의 연속이던 2002년 6월 어느 날. 우연히 지켜본 저녁 뉴스가 앨더먼 씨 가족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테러와 대학살, 고문 등을 겪은 뒤 정신적인 고통으로 허덕이는 인구가 지구촌에 10억 명에 이른다는 보도였다. 이중 50~70%는 자살 충동으로 정상적인 생활조차 불가능하다는 수치가 이어졌다. 앨더먼 씨 가족은 곧바로 추모기금을 털어 아들 이름을 딴 재단(Peter C Alderman Foundation·PCAF)을 세웠다. 설립 첫해인 2003년부터 캄보디아 우간다 케냐 등에 이들을 위한 심리치료 클리닉을 만들었다. 치료 전문 인력을 양성해 현재까지 10만 명이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했다.

앨더먼 가족에게 잊혀지지 않는 환자는 우간다의 젊은 엄마 에스터 씨. 마을에 들이닥친 반군은 에스터 씨가 보는 앞에서 남편을 총살하고 저항조차 할 수 없었던 다섯 살, 두 살짜리 아들 둘을 무참히 살해했다. 에스터 씨는 집단 강간을 당한 뒤 길가에 버려졌다. 어린 두 딸과 기적적으로 재회했지만 심각한 우울증과 자살 충동은 사라지지 않았다. 앨더먼 씨는 "우리 가족은 피터를 잃는 트라우마를 한 번 겪었지만 에스터와 같은 이들은 일생 동안 여러 차례의 트라우마를 겪는 것을 알게 됐다"며 심리 치료를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PCAF 클리닉은 비극을 겪은 여성들과 연결해 주고 심리치료를 지원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1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모범시민 표창'을 수상했다.

―재단을 운영하고 싶어도 힘이 모자라는 유가족들이 많은데요….

"우리도 특별할 게 없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열정 그리고 주변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꼭 재단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배고픔에 허덕이는 이에게 정성스러운 한 끼 식사를 대접하는 것과 같은 작은 실천도 충분하다고 믿어요. 아들이 애완동물을 사랑했다면 동물권익단체에 당장 가입해 활동했을 거예요. 아들의 이름으로 그 아이가 남긴 삶의 흔적을 이어가는 것이 최선의 애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들은 삶과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피터의 이름으로 '사람 살리는 일'에 매진하고 있습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고통은 여전해도 상처는 아물수 있느냐는 우문에는 대답 대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얼마 전 아프리카를 방문했는데 재단을 통해 치료받은 소말리아의 한 남성을 만났어요. 우리를 보자마자 고함을 지르더군요. 처음엔 우리를 저주하며 반미 구호를 외친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아들을 위해 기도해준 것이라고 통역사가 말해줬습니다. 그 때 저는 펑펑 소리를 내 울었어요. 아마 피터도 함께 기뻐했을 거예요."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소개한 앨더먼 씨는 "신앙심이 두터운 다른 9·11 유가족에 비해 더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아들의 이름으로 실천하는 이타심(altruism)이 내게는 곧 종교"라고 했다.

인터뷰 말미, 앨더먼 씨는 "어둡고 깊은 구렁텅이 같은 고통이지만 그 구멍에 빠져 비명을 지르고 허우적거리는 횟수가 조금씩 뜸해질 수는 있다"고 되뇌듯 말했다. 바다 건너에서 현재 진행형인 '에델만 가(家)의 힐링'이 세월호 참사 유가족에게도 언젠가는 전해지길 바라는 간절함으로 다가왔다.

김정안 기자 jkim@donga.com
#9.11테러#세월호#어버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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