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한국학’ 연구하는 외국인 학자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24일 03시 00분


“젓가락 장단 맞춰 노래 한자락… 한국의 멋에 푹 빠졌죠”

5월 2일(현지 시간) 미국 하버드대에서 한 노(老)교수의 조촐한 ‘은퇴 기념 심포지엄’이 열렸다. 주인공은 미국에서 ‘한국 문학 알리기’에 앞장서 온 데이비드 매켄 교수(70).

그는 1966∼68년 미국 평화봉사단의 자원봉사자로 한국에 체류하던 중 한국 문학과 사랑에 빠졌다. 1976년 하버드대에서 한국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를 특히 매료시킨 건 한국의 시조. 황진이와 정철의 시조를 줄줄 읊으며 그 안에 담긴 성찰적 의미를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해왔다.

학계에서는 그를 ‘해외 한국학 2세대’로 분류한다. 1세대로 분류되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의 한국학 원로학자들은 중국학 일본학 러시아학을 공부하다가 한국으로 눈을 돌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켄 교수 같은 2세대 학자들은 1970, 80년대 한국학의 기초를 본격적으로 닦았다. 한국을 제대로 알고 체험하며 연구한 ‘첫 세대’라고 할 만하다.

이들 2세대 한국학 학자들이 매켄 교수처럼 은퇴하거나 은퇴를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이 연구해온 한국은 어떤 모습인지 궁금했다. 한국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과 공동 기획해 2세대 대표 학자 3인을 e메일로 인터뷰했다.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 소장을 지낸 카터 에커트 교수(69), 고려대에서 한국역사 공부를 시작해 워싱턴대에서 한국역사 박사학위를 받은 존 덩컨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동아시아 언어문화역사학과 교수(69), 그리고 매켄 교수이다.

‘한국’ 하면 떠오르는 한 글자, 정(情)

학자들은 쉽고 간단한 내용도 어렵고 길게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이건 기자의 경험적 선입견이다. 그래서 ‘단순 무식 과격해 보이는 질문’을 먼저 던졌다.

―한국의 특징이나 특성을 한 단어나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에커트 교수=한 단어로 표현하는 것은 주의해야 할 것 같다. 다른 문화들처럼 한국도 다양한 사람들과 그 삶의 방식, 그리고 (다양한) 문화로 이뤄진 복잡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 단어로 한국을 표현하자면 ‘정(情)’이라고 하고 싶다. 상대적으로 작은 이 나라에서 인생의 초기에 형성되는 가족 관계를 비롯한 사회적 관계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깊게 머물러 있다. 한국 사람들은 그 개인적 관계에 비중을 많이 두고 투자한다. 요즘과 같이 비인격화되고 상업화되는 사회에서 (‘정’이란) 매우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덩컨 교수=한국(대학)에서 공부하기로 했을 때 상당히 개인주의적인 미국인과는 달리 한국인들은 인정(人情)이 많았다. 아쉽게도 지금에 와서는 인정보다 경쟁의식이 강해진 것 같다.

매켄 교수는 한국의 정을 체험했던 옛날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줬다. 그는 “1966년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안동농고에 갔을 때 처음으로 한국을 접하게 됐다. 음식은 정말 맛있었고, 대중음악은 굉장히 생기가 넘쳤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음악 현장(pop music scene)은 이른바 한국 특유의 술자리 가무(歌舞)를 뜻했다. 매켄 교수는 “누군가 ‘노래합시다’라고 하면 순서를 돌며 노래를 계속했다. 감탄할 만한 젓가락 반주가 함께했다. 나는 이런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래를 부르려면 막걸리 몇 모금을 더 마셔야 했다”고 회고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영어로 부르지 않아 성공했다”

이른바 한류(韓流)의 열풍은 이제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통계로 확인되는 객관적 사실이라고 한국국제교류재단 측은 설명했다. 재단이 1월 발간한 ‘지구촌 한류 현황’에 따르면 2013년 기준으로, 파악된 한류 동호회만 세계적으로 987개에 이른다. 회원 수는 약 900만 명. 더 주목해야 할 건 증가 추세라는 점이다. 2012년에는 동호회 783개, 한류팬 약 670만 명이었다. 한류팬이 1년 새 35.9%나 급증한 셈이다.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뒤떨어져 있는 동남아나 중남미,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선진국이 밀집된 유럽 지역의 한류 열풍도 눈길을 끈다. 재단 측은 “유럽의 한류 동호회는 142개(2012년)에서 213개(2013년)로 50%로 늘었고, 가입회원 수는 35만 명에서 117만 명으로 그야말로 폭증세(234% 증가)를 보였다”고 말했다.

이들 한국학 학자들에게 ‘이런 한류 열풍을 체감하느냐’고 묻자 지구촌을 강타했던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대한 얘기가 답변으로 돌아왔다.

▽매켄 교수=2012년 가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을 때 나는 한국에 있었다. 싸이의 성공은 다른 팝 상품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그는 본인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는) 내가 오래전 한국에서 테이블에 둘러앉아 막걸리 마시며 두드리던 젓가락을 떠올리게 한다. 지난해(2013년) 봄 싸이는 하버드대 강연에서 하나의 일화를 소개했다. 캘리포니아의 에이전트에게 ‘한국에 가서 영어 버전을 녹음하려고 한다’고 하자 그 에이전트는 ‘영어로 노래하는 또 한 명의 한국 가수가 되지 마세요. 한국어로 놔두세요’라며 싸이를 말렸다고 한다. 그것이 세계 시장에서 한국 상품을 마케팅하고 ‘브랜딩’ 하는 핵심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이 되었든 한국어 또는 한국적인 것으로 유지해라. 그러면 구별돼 보이고 존경받을 것이다.

▽에커트 교수=한류 현상은 한국에 대해 몰랐을, 그리고 신경 쓰지 않았을 다양한 사람들의 관심을 한국으로 이끌었다. 하버드대에서 내가 강의하는 한국현대사 수업을 봐도 알 수 있다. 올해 2014년 봄 학기에 다양한 배경과 국적을 가진 약 100명의 학생이 각기 다른 이유로 내 수업을 수강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한국의 팝 문화, 특히 영화나 음악에 관한 관심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싸이(의 강남스타일)는 굉장한 현상을 만들어 왔다.

미국 서부의 명문 UCLA의 덩컨 교수는 “내가 재직하는 UCLA뿐만 아니라 중남미 여러 대학에서도 한국의 대중문화에 대한 젊은 세대들의 지대한 관심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들에게 한국은 ‘매우 낭만적이고 매력적인 나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한국학의 발전을 위해 버리고, 취해야 할 것들

한국학 학자들인 만큼 한국학의 발전 방향에 대한 조언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물었다. ‘한국학은 앞으로 어떤 분야, 어떤 영역에 집중해야 할까요.’ 이들의 현답(賢答)을 듣고 나서야 이 질문이 우문(愚問)임을 깨달았다.

▽에커트 교수=나는 한국학을 어떤 특정한 방향에 집중해 발전시키기를 권유하지 않는다. 지금은 한국학 연구의 역사에서 가장 흥분되는 확장의 시기라고 생각한다. 과거 한국학은 주제나 해석에 있어서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들로 상당한 제약을 받았고 다른 나라 학자들과의 교류도 제한됐다. 그러나 지금은 학자들의 세계가 훨씬 열려 있고, 교류도 활발해졌다. 한국학 분야로 오는 총명한 학생들이 지금까지 제기되지 않았던 질문들을 하고, 이미 세워진 개념이나 이론에 도전하며 한국학 분야를 자연스럽게 변화시키고 이끌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한국학을 특정 방향으로 이끌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덩컨 교수=한국의 경제적 성장과 민주화를 강조해야 되겠다. 아울러 그 경제적 성장과 민주화를 위해 한국 국민들이 치러야 했던 대가도 보여주고 한국이 지금 겪고 있는 제반 문제점을 국가와 사회가 어떻게 하려 하는지 보여 주는 것도 중요하다.

결국 한국학은 한국의 빛과 그늘을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 하고, 그런 과정에서 자유로운 젊은 미래 세대들이 자연스럽게 이끌어가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에필로그―그들에게 세월호를 다시 묻지 않은 이유

이 e메일 인터뷰와 관련 취재활동은 2월 말에서 4월 초 사이에 진행되고 완료됐다. 세월호 참사(4월 16일) 이전이었다. ‘정신적, 심리적 IMF(국제통화기금) 위기’라고도 인식되는 국가적 비극을 겪으면서 이들 한국학 학자 3인에게 세월호에 대한 의견을 추가로 물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하지 않았다.

이들의 답변을 몇 번씩 곱씹다 보니 그 안에 한국 사회에 주는 조언과 충고, 그리고 경고가 모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매켄 교수=(1960년대 후반) 한국에 있는 동안 나는 (인정 있는 막걸리 술자리에서) 돌아가며 노래하는 그런 전통 속에서 한국 사람들의 생기 넘치고 적극적인 참여가 무엇인지를 느끼게 됐다. (외국인인) 내가 노래 부르려 시도할 때 (한국) 사람들이 호응하고 격려해줬고 그 결과(잘 못 부른 노래)에 대해 아무도 핀잔을 주지 않았다.

▽에커트 교수=내가 가끔 염려하는 것은 한국인들이 완벽한 ‘한국적 브랜드’를 만드는 것에 굉장히 집착한다는 점이다. 그런 강력한 한국 브랜드는 국가적 자긍심의 근원이 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인 개인들이 일정한 임의적 기준을 따르도록 제한할 수도 있다. 한국 민주화의 위대한 선물 중 하나는 한국인들이 정부나 사회의 지시 없이도 그들 개인의 다양한 흥미와 각각의 고유 브랜드를 만들 수 있도록 해왔다는 것이 아닐까.

▽덩컨 교수=걱정되는 것은 그들(외국의 한류 팬들)이 직접 한국 사회의 복잡하고 어려운 실정을 체험하게 되면 한국에 대한 실망을 느끼거나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 사회의 지나친 경쟁 체제, 경쟁의식을 덜어냈으면 좋겠다.    

▼ ‘한국학 개설’ 지원 못해준 한국… 100개국에 공자학당 세운 중국

외국의 한국학 수요 못따라가는 공급


이른바 한류(韓流) 열풍은 세계 곳곳에서 한국어와 한국학에 대한 욕구도 급증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재정적, 제도적 지원의 틀을 갖추는 데 어려움이 적지 않다.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가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

2012년 베트남 달랏대 동방학부 신입생 120명에게 ‘선택하고 싶은 전공’에 대해 물었다. 이 학부는 베트남학과(국어과 또는 국문학과 격), 일본어학과, 한국어학과로 구성돼 있다. 그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베트남학과에 20명, 일본어학과에 1명만 지원한 반면 한국어학과에 나머지 99명이 몰렸다. 학교 측은 99명 중 일부의 마음을 돌리느라 진땀을 뺐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학교에 한국어 박사학위 소지자는 한국국제교류재단이 파견한 객원교수 1명뿐이다.

지난해 미국 예일대에서는 학보를 통해 ‘한국학 전공을 개설해 달라’는 학생들의 요구가 소개됐다. 이에 대해 이 대학 동아시아학과위원회는 “2000년대 초부터 한국학 전공 개설을 준비해 왔지만 예산 등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한국국제교류재단 관계자는 “대학 자체적으로 신규 교수직을 마련해 전공 과정을 신설하는 일은 어느 나라에서든 쉽지 않다. 그래서 수요에 맞춰 속도감 있게 진행되기가 어렵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K팝 등 문화적 한류가 한국에 대한 관심을 이끄는 일종의 기호 식품이라면, 한국어나 한국학 교육은 그 관심을 건전하고 건설적인 이해로 키우는 건강식이나 영양식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일본은 1972년 설립된 일본국제교류기금(Japan Foundation)의 활동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 돈만 밝히는 ‘경제동물’ 같은 일본의 부정적 국가이미지를 바꾸는 데 큰 효과를 봤다고 평가받는다. 이에 자극받은 듯 중국도 중국교육부 산하 ‘공자학원’의 활동 범위를 계속 확대하고 있다. 공자학원은 2012년 기준으로 세계 100여 개국에서 400개의 공자 아카데미(대학 내 중국어학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초중등학교에도 비슷한 성격의 공자학당이 500개나 설치돼 있고 그 숫자는 계속 늘고 있다.

한국 정부와 관련 단체들 내부에서는 “자국의 언어와 학문을 지원하는 활동에서 중국 일본과의 격차를 줄이기는커녕, 더욱 벌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는 걱정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한 관계자는 “한국은 중국 일본에 비해 규모 면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국어 및 한국학 지원 관련 부처와 기관이 유기적으로 협력해 단일 대오를 형성해야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데 그마저도 잘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고 말했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한국학#한류열풍#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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