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누군가가 당신에게서 스마트 폰을 빼앗는 다면, 당신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아니면 그걸 극복하고 스마트 폰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글쎄, 내겐 끔찍한 일이다. 몇 주 전 나는 실수로 스마트 폰을 집에 두고 나오는 바람에 주말 이틀간을 스마트 폰과 '분리'된 채 지내야 했다. 그때 겪은 낭패감이란…. 일일이 열거하기에 앞서 다시 생각하는 것조차 나를 절망감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니 내게 스마트 폰 없는 삶이란 상상조차도 하기 싫은 총체적 좌절이다.
그런데 최근에 이것 없이도 행복하게 일상을 영위하는 특별한 사람을 만났다. 동의대 철학과의 박만준 교수(64·사진)다. 그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이동전화를 가져 본 적이 없다. 그는 평생에 이동통신장치라고는 '삐삐'라고 불렸던 페이저(pager·나를 찾는다는 사실을 '삐삐'소리로 알려주며 연락할 전화번호를 표시해주는 단말기)까지도 사용 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수습기자로 처음 신문사에 입사할 당시 이게 시판됐으니 페이저의 등장은 아마도 1983년인 듯싶은데 박 교수는 그 페이저를 1983년경에
처음 보고 그때 이미 이동통신 기기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내렸다고 한다. 당시 기자나 경찰관, 의사들은 이걸 차고 다니며 급한 호출에
응했다.
그런데 같은 페이저라도 그 물건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나와 박 교수에게 전혀 달랐다. 내겐 활동범위를 무한대로 확장시켜 주는 이동통신이란 이기의 현란한 체험의 서막이었다. 그리고 이젠 단 한 시간도 스마트 폰 없이는 살아 갈 수 없는, 그래서 스마트 폰을 신체의 일부로 착각하는 스마트 폰의 노예로 이끈 중독의 1단계였다. 반면 박 교수에게 페이저는 자신의 주체적인 생각과 행동을 방해하는 위험물임을 확인시켜 준 고마운 물건이자, 오늘날까지 스마트 폰의 노예가 되지 않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한 운명적 만남이었다.
그래서 박 교수를 만나보기로 했다. 도대체 핸드폰 없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또 그런 삶은 어떤 것인지가 궁금해서다. 그는 부산에 산다. 그리고 지금은 방학 중. 그의 연락처를 묻자 학교에선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주었다. 물론 전화번호는 집과 연구실 두 개뿐. 나는 그와 연락할 방법으로 이메일을 택했다. 이동전화를 쓰지 않는 그가 이메일은 이용하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메일을 보낸 다음 날 답신이 왔다. 내가 원하는 날엔 시간내기가 어렵다고. 그래서 그 이튿날 만나기를 요청하는 답신메일을 보냈다. 그러자 금방 내 스마트 폰으로 그가 전화를 걸어왔고 우린 약속했다. 이메일은 모든 학교행정이 이메일로 이뤄지기 때문에 쓰지 않을 수 없고, 또 그의 철학에도 크게 반하지 않는 것이어서 애용한다고 했다.
박 교수가 정해준 약속장소는 부산시청 1층 로비의 커피숍이었다. 그날 부근에서 선약이 있어 이리로 정한 것이라고 했다. 본격적인 인터뷰에 앞서 나는 박 교수가 환경운동에 나서게 된 연유부터 물었다. 그는 부산하천살리기운동본부의 회장을 6년이나 지냈고 지난해부터는 부산강포럼의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다.
“1980년대까지 만해도 다대포부터 광안리 해운대 송정까지 부산연안은 어민들의 생계터전이었습니다. 미역과 조개 우렁쉥이가 나고 멍게도 이 바다에서
양식해 먹었습니다. 그런데 1983년 어느 날인가 부산연안이 심각하게 썩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공론화되기 시작합니다. 더욱이 1991년엔 페놀이
강물에 흘러들어 시민들이 물을 마실 수 없게 되는 끔찍한 사고까지 일어나게 됩니다. 일련의 환경재앙을 겪으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환경이 우리 일상의 관심 영역에 들어올 수밖에 없게 됐다는. 생존의 문제로 환경을 인식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생물학전공 교수에게 수질조사를 의뢰했고 그 오염실태를 수치로 확인하게 되면서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문제라고 결론짓고 정부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기로 했습니다. 그게 1989년 부산에 '공해추방운동시민협의회'를 만들게 된 계기인데 제가 환경을 인간의 삶에 관한 문제로 인식하고 활동하기 시작한 지 5년 만의 결실이었습니다.”
철학이란 영어단어 '필로소피'(Philosophy)는 '생각을 사랑함'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철학자의 삶이란 생각을 사랑하는 삶인데 그런 면에서 박 교수에게 환경운동이란 온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철학의 한 방편이다. 더불어, 생각을 상념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까지 옮기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다른 철학자와 차별된다.
그에게는 일상의 행동 자체가 생각, 즉 철학의 소산이다. 이동전화 없는 삶도 그런 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이동통신기기로 가장 처음 나온 삐삐부터 이제껏 사용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게 1983년인데 당시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이 제게 이로울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더군요.”
그런 결정을 한 계기는 이랬다. 환경단체에서 활동할 때였는데 정치 문화 환경 쪽 단체가
연합해 일을 하다 보니 각각의 단체에 소집한 회의에 두루두루 참석해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만약 삐삐를 사용한다면 수시로 연락을 받게 될
것이고 그러다보면 내가 오늘 어느 단체와 이런 일을 하겠다고 숙고해 세운 계획이나 약속을 바꾸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질 것이란 우려가 들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렇게 된다면 편리한 게 아니라 나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결정을 방해할 것인데 내가 정한 오늘 할 일은 미리 이모저모 따져서
사려 깊게 생각해 정해 둔 것인 만큼 그걸 그대로 행동에 옮기자면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결론이었다.
그는 더 이상 문명의 이기에 자신이 구속당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삐삐를 버렸다. 이동전화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편리해도 나의 생각과 행동을 구속할 것이 틀림없으니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버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내 질문은 계속됐다. "그래도 불편함은 있으실 텐데요. 급한 일을 당한다든가 하는. 혹시 없었나요?" 박 교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단 한 번도 불편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유로움을 느끼고 여유를 갖게 되니 더 편안합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저처럼 살려면 약속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면 약속은 절대로 바꾸지 않고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니까요. 그러니 이동전화를 갖지 않으면 저처럼 약속을 소중히 여기고, 만남 역시 귀중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교수님께서야 불편이 없더라도 가족은 그렇지 않으실 텐데요. 연락이 닿질 않으니….
"그럴 수도 있지만 이젠 일상이 되어 식구들도 별 불편을 느끼지 않습니다. 제 경우 집 바깥에서 가족과 연락이 닿는 경우는 연구실 한 곳 뿐이고 외부생활의 3분의 2는 연구실 밖에서 지내니까 내가 집을 나서면 전 가족들에게 '행방불명자'가 되는 셈입니다. 찾을 생각을 아예 않는 것이지요. 저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집밖에 있을 때는 나를 남편이나 아버지로 생각하지 말라고."
-혹시 교수님의 삶을 본받거나 따라하는 분들은 없었나요.
"왜요, 더러 있었지요. 그런데 모두들 중도에 포기하더군요. 가장 길게 버틴 경우가 3개월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엔 담배 끊는 것보다 훨씬 쉬워 보이는데…. 중도포기는 휴대폰을 버리고 난 다음 자신이 얻게 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휴대폰을 다시 드는 것이지요."
-아름다운 모습이란 어떤 것인가요.
"자유로움과 여유로움이지요. 휴대폰은 기능상 통신수단이자 저장장치입니다만 폐해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나태함입니다. 기자님도 겪으시겠지만 꼭 알아두어야 할 정보마저 스마트 폰에 담아두고는 외우지 않아 낭패를 본 적이 있으시지요. 사실 그런 많은 것들이 우리를 나태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스마트 폰은 너무도 즉흥적인 것을 가능케 하는 바람에 느리게 느리게 진행되는 자연의 속도에 역행해 빠르게 빠르게 살라고 삶을 재촉합니다. 저는 그 모든 게 우리 정신을 핍박한다고 봅니다. 저는 사람들이 자연의 속도로 느리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여유도 느끼고 자유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게 제가 말하는 아름다운 삶입니다. 스마트 폰을 없애고도 불편만 느낄 뿐, 이런 아름다운 삶을 보지 못한다면 당연히 다시 들 수밖에요."
박 교수에게는 또 하나의 특별한 원칙이 있다. 차를 소유하지 않는 것이다.
-그건 또 무슨 연유인가요.
"부산에서 서울까지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는 상황을 한 번 생각해보지요. 옆에 동행이 있습니다만 판에 박은 대화 외엔 자연스레 말이 오가지 않게 마련입니다. 그건 쾌속으로 질주하는 자동차 실내라는 상황에서 비롯된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그런데 천천히 거리를 걷는 장면을 생각해보세요. 좀 다르지 않을까요. 전 주말이면 아내와 함께 영화관을 자주 갑니다. 그런데 제겐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걸어서 30분 거리와 1시간 10분 거리 이렇게 두 개의 영화관입니다. 30분 거리 영화관은 가깝긴 해도 차량통행도 많고 상점도 많은 도심을 지나야 해 걷기가 불편합니다. 반면에 1시간10분 거리 영화관은 걷는 길이 편안해 우린 이 영화관을 찾습니다. 걸어서 이 길을 오가다보면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서로에게서 발견하게 됩니다. 거리 주변의 환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할 소재를 끊임없이 제공해서인데 그러다보니 이야기꽃이 필 수밖에요."
-역시 느리게 사는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여유와 자유이겠지요.
"물론입니다. 우리는 천천히 그리고 함께 가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게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키고 서로를 이해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께 걷다보면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걸 통해 자신의 느낌과 생각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도 알게 됩니다. 걷는 길이 도심이라도 상관없다고 봅니다. 천천히만 걷는다면 도심에서도 자연의 변화를 섬세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웃집 담 너머로 나무에 핀 꽃도 보고 보드블록 틈새로 삐죽 싹을 내민 풀 같은 것들도 봅니다. 그런 모든 게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바꿔 놓습니다. 그렇게 함께 걷다보면 늘 보는 아내와 자식도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이렇듯 천천히 걸으면 삶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바꾸어줍니다. 그러니 나를 위해서라도 천천히 걸어야지요. 그게 차를 사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가급적 두 발로 걷기를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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