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사천의 바닷가에서 태어난 소년이 있었다. 고향에서 중고교를 마치고 부산으로 유학 와 부산대 조선공학과를 졸업하고 현대중공업에 입사했다. 여기까지는 바닷가 소년의 평범한 인생 스토리다.
이후부터 이야기가 달라진다. 청년은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단돈 30만 원을 들고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거기서 조선해양 분야의 최고 교수 밑에서 공학자로 커간다. 점차 두각을 나타내더니 마침내 50대에 세계적인 조선해양공학자 반열에 오른다.
백점기 부산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57)의 이야기다. 그는 선박·해양플랜트 안전설계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알아준다. 그는 250여 편의 SCI/SCIE급 국제저널 논문을 포함해 500여 편의 논문을 썼다. 세계적인 논문상 학술상을 여러 개 받았다. SCI 논문 피인용실적은 905회. 영문 저서 4권은 미국 MIT 등에서 교재로 쓰고 있고, 국내외 특허출원도 40여 건. 연구와 실용, 양면에 두루 탁월한 전문가라 할 만하다.
그런 때문인지 지난해부터 상복이 터졌다. 조선해양공학계의 양대 노벨상 중 하나라는 '데이비드 W 테일러' 메달을 받았다. 또 영국왕립조선학회의 최우수논문상, 미국기계공학회 OMAE 최우수논문상, 그리고 국내에선 경암학술상을 받았다. 올해는 조선해양분야 양대 노벨상의 나머지 하나인 윌리엄 프루드 메달 수상자로 결정됐다. 수상식은 내년 런던에서 열린다.
백 교수는 방학 중인데도 바쁘다. 겨우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인터뷰 당일 연구실을 찾았을 때 개인 비서를 포함해 스태프가 7명이나 돼 놀랐다. 부산대 선박해양플랜트 기술연구원 원장도 겸하고 있어 연구원과 연구 프로젝트 관리, 개인 일정 등을 조정하기 위해 필요한 인원이다.
먼저 조선 강국 한국에서 해양플랜트의 위치와 전망에 대해 물었다. 그랬더니 뜬금없이 백 교수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꼽은 향후 100년 동안 인류의 10대 당면과제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되물었다. 그러고는 이내 '에너지·물·식량 부족, 인구폭발…'등 10대과제를 볼펜으로 노트위에 써내려가며 설명을 했다. 교수다웠다.
"인류의 가장 큰 당면과제는 역시 에너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에너지는 인류문명 발전의 기폭제 역할을 해왔다. 지난번 블랙아웃 사태에서 보았듯 이제 에너지 없이는 살 수 없다. 현재 지구상 에너지의 80%가 석탄 석유 천연가스 등 화석연료에서 나온다. 나머지가 수력과 원자력, 신재생에너지다. 이 비율은 2030년이 돼도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육지의 화석연료가 고갈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안은 지구 표면의 74%를 차지하고 있는 바닷속뿐이다. 거기에는 막대한 화석연료가 매장돼 있다. 지금은 수심이 낮은 바다에서 에너지를 캐내고 있지만 앞으로 점차 깊어질 것이다. 심해에서 에너지를 파내는 모든 작업이 바로 해양플랜트다. 인류에게 에너지가 필요한 이상, 해양플랜트는 앞으로도 계속 성장할 수밖에 없다."
백 교수는 "해양플랜트는 하나에 1조 원에서 10조 원에 이르는 중후장대(重厚長大) 산업이지만 고도의 기술집약적 산업이고 많은 일자리도 창출하는, 그야말로 3박자를 갖춘 유망 산업"이라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해양플랜트는 △탐사(인공위성과 선박이용) △시추 △설비(설계·제작 엔지니어링) △운전(유지 보수) △폐기처분(철거) 등 5개의 종합 과정이다. 이 중 한국은 제작에 강점이 있지만 설계는 외국의 하청을 받고 있는 단계라는 것.
백 교수는 "앞으로 해양플랜트 산업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설계 자립화가 필수적이고, 이를 위해서는 석박사급 인력양성이 시급하다"고 역설했다. 설계자립화를 위해서는 2030년까지 석사급 인력 1만6000명이 필요한데 지금은 1년에 50명 정도만 배출되고 있다는 것. 그래서 백 교수는 올해 10월 가동예정인 경남 하동 해양플랜트 종합시험연구원에 들어설 영국 애버딘대학원 분교에 기대를 걸고 있다. 애버딘대는 북해 유전 개발에 필요한 인력을 보급해오고 있다.
그의 핵심 연구 분야는 안전 설계. 바람 조류 침몰 충돌 화재 폭발 같은 극한 환경에 견딜 수 있는 안전설계와 그에 필요한 핵심기술을 개발해 왔다. 이 기술을 상용화해 실제로 세계 30여 개국에서 활용했다. 안전설계분야에서 이름이 높은 때문인지 2010년경 제임스 캐머런 감독 측으로부터 '타이타닉 사고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연구결과 타이타닉호가 빙하에 부딪친 뒤 23도로 기울어졌을 때 두 동강이 났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90도가량 기울어지며 배가 부서지는 것으로 나왔다. 캐머런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서 비과학적인 대목을 바로잡는다는 차원에서 디스커버리 채널을 통해 관련 내용을 공개한 바 있다.
올봄에는 세월호 사건이 터지며 백 교수를 찾는 언론이 많았다. 그는 "100회 이상 인터뷰를 했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국민이 의문을 갖는 사고에 대해 전문가의 사회기여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응했다"고 말했다. 그는 2013년 12월부터 정부산하 화재폭발안전포럼 이사장을 맡아 안전대책과 대응체계 구축에도 노력하고 있다.
조선해양분야의 양대 노벨상으로 불리는 두 메달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했다. "테일러 메달은 조선해양공학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한 미군 해군제독 테일러를 기리기 위해 1935년 미국조선해양공학회가 제정했다. 내가 74번째 수상자다. 지난해 상을 받을 때 주최 측에 '내가 미국과 유럽을 제외한 첫 수상자'라고 했더니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웃음). 또 프루드 메달은 선박설계 분야에 공적을 세운 영국 유체역학자 프루드를 기리기 위해 영국왕립조선학회가 만든 상이다. 25번째 수상자인데 영국 외에서는 받은 사람이 없다. 2개상을 모두 받은 사람은 2명뿐이다. 내가 세 번째다. 비유럽권에서 두 상을 모두 받는 것은 내가 처음이다."
백 교수는 현재 국제 선박해양플랜트 전문가회의(ISSC) 상임이사 등 다수의 국제단체에서 활약하고 있다. 편집위원과 논문심사 위원으로 활동하는 국제저널만도 10여 개. 그는 국제저널 '선박과 해양구조물(Ships and Offshore Structures)'에 애착을 갖고 있다. 기존의 국제저널이 너무 이론적이거나 실용주의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양쪽을 아우르는 저널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9년 전 제안해 영국출판사의 도움을 받아 만들고 있다. 9년째 편집장을 맡고 있다. 그는 "공학도의 좋은 논문이란 맛있는 요리와 같다"며 "좋은 재료(실험 시뮬레이션)로 어떤 요리를 할지(아이디어)를 결정해 새 레시피를 개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끝으로 앞으로 계획에 대해 물었다. "아직 50대로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 우선 눈에 보이는 과제부터 하나하나 풀어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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