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방에서 눈을 뜰 때마다 이곳이 어디인지 기억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책꽂이에 붙어있는 준혁이의 사진과 창 너머 낡은 연립주택 벽이 보이면 오늘이 며칠 째인지 생각했다. 기자는 경기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에 있었다.
고잔동의 시계는 4월 16일에 멈췄다. 골목길을 왁자하게 채우던 단원고 아이들 250명(사망·실종)은 그날 한순간에 사라졌다. 부모들은 일손을 멈췄고 동생을 잃은 형과 언니는 휴학을 해 아침이면 단원고와 유가족 천막으로 향했다. 식당 사장도, 문구점 주인도, 파출소 직원도 한창 다른 이야기들을 하다가도 결국 ‘아이들’ 이야기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이곳은 세월호 이후의 고잔동이다.
기자는 8일부터 14일까지 6박 7일간 2학년 5반 생존 학생 박준혁 군(17)의 집에서 함께 지냈다. 단원고를 중심으로 북쪽의 와동과 남쪽의 고잔1동은 단원고 피해 학생(사망·실종자와 생존자)이 가장 많이 살던 곳이다. 단원고 2학년 가운데 와동에는 99명, 고잔1동에는 108명이 살았다. 기자는 일주일간 이 두 곳을 걸어다니며 남겨진 이들의 모습을 기록했다.
매일 오전 7시 정각이면 어머니가 차린 아침상에 준혁이, 누나와 함께 둘러앉았다. 수더분한 성격인 준혁이는 기자에게 누나 방을 내줘도 괜찮다고 했지만 첫날은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준혁이는 세월호가 물에 잠긴 뒤 잠수를 해 헤엄쳐 바다로 탈출했다. ‘배’를 탔던(생존 학생들은 세월호를 ‘배’라고 불렀다) 같은 반 친구 36명 중에서 살아 돌아온 것은 준혁이를 포함해 9명뿐이었다.
아침이면 기자는 누나, 아버지와 함께 생존 학생 학부모 대책위원회 사무실이 있는 단원고로 갔다. 일용직에 종사하던 아버지는 다른 생존 학생 아버지 17명처럼 휴직을 했다. 대학 3학년이던 누나는 휴학하고 대책위원회에서 컴퓨터 작업을 맡았다.
아버지는 담배가 늘었다. 아버지들의 차에는 ‘진상규명’ 스티커가 붙어 있거나 아이들 사진이 운전석 앞에 달려 있었다. 평생 해본 적 없던 서명운동, 국회 농성을 다니느라 준혁이 아버지의 얼굴은 새카맣게 타 있었다. 학부모 대부분은 ‘단기기억상실’ 증상을 겪었다. 차를 타고 한참을 가다 문득 “내가 언제 여기까지 왔지”라며 멈췄다. 생존 학생 학부모 대표 장동원 씨는 9일 오후 한참 동안 변호사와 통화를 한 뒤 끊자마자 “내가 방금 누구랑 통화했지”라고 중얼거렸다.
준혁이보다 다섯 살 많은 누나의 책장엔 사고 이후 준혁이와 찍은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도 준혁이였다. 누나는 단원고에 갔다가 준혁이가 수업을 마치면 같이 집에 걸어왔다. 온 식구가 ‘퇴근’한 저녁이면 어머니는 소파에 앉아 학부모 단체 카톡을 하나하나 짚어보며 읽었다. 엄마 아빠들은 카톡방에서 밤늦게까지 아이들 얘기를 하며 위로도 걱정도 함께 나눴다.
기말고사가 한 주 뒤로 다가왔지만 준혁이는 공부가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아이들은 수업에 예전처럼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준혁이는 “반 친구들 거의가 수업을 안 들어요. 서너 명만 듣고, 나머지는 엎드려 있거나 폰 만지고 있거나 해요”라고 말했다. 집에 오면 컴퓨터게임으로 시간을 보냈다. 취미이자 특기였던 배드민턴도 한동안 치러 나가지 못했다. 단원고 배드민턴 동아리 소속이었던 준혁이는 적금을 모아 새 배드민턴 채를 샀지만 함께 배드민턴을 치던 친구는 배에서 나오지 못했다. “(배드민턴 동아리에 있던 20명 중에서) 아무도 없어요(안 남았어요). 아, 한 명… 저 말고 한 명 있어요”라고 준혁이는 말했다.
오전 8시 아이들의 등교가 끝나면 오전 9시 학부모들의 등교가 시작됐다. 생존 학생 학부모들은 여전히 불이 켜진 예전 빈 교실 옆 사무실에서 매일 아침 회의를 했다.
단원고 2학년 아이들의 원래 교실엔 책상과 사물함이 그대로 있었다. 평상시처럼 아이들이 등교할 시간이면 불이 켜졌고 종례시간이 지나면 꺼졌다. 하지만 교실엔 아무도 없었다. 희생 학생들의 책상 위엔 비닐로 포장된 국화꽃이 한 송이씩 놓여 있었다. 빈 책상에 ‘삼촌 된 것 축하한다. -사랑하는 형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그 사이 조카가 생겼다는 형의 ‘신고’였다. 매일 오후 2시가 되면 생존 학생 학부모들은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빈 책상을 쓸고 닦았다.
생존 학생 75명의 교실은 미술실 컴퓨터실 등 특별실에 새로 마련됐다. 복도 가운데에 생존 학생 학부모 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어머니 아버지는 이곳에서 매일 오전 9시 회의를 열고 살아남은 아이들을 돌볼 방안을 논의했다. 아이들의 방과 후 활동 지원을 오랫동안 요청했지만 학교도 교육청도 “논의 중”이라고만 했다. 학부모들은 지역 교육봉사단체와 체육관에 도움을 청하고 아이들에게 직접 방과 후 특별활동 신청을 받았다. 아이들은 곧잘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엄마 아빠가 있는지 확인했다. 여학생 하나가 문을 빠끔히 열고 “저희 엄마 여기 있어요?”라고 물으면 엄마는 “그래 내 새끼”라고 했다. 아무 일이 없어도 아이들은 사무실 안 냉장고 핑계를 대며, 엄마 아빠 얼굴을 보러,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문을 두드렸다.
가끔 아이들은 반대쪽 복도에 있는 원래 교실로 가 예전의 자기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멍하니 있거나 엎드려서 책상 위에 뭔가를 끼적이곤 했다. ▼ “눈에 뭐가 들어갔나봐” 말하다 하늘보는 엄마 ▼
2학년 희생 학생 양온유 양은 부모와 세 동생과 함께 명성교회 뒤편에 딸린 집에 살았다. 온유는 세월호 갑판 위에 있다가 친구들을 구하러 선실로 간 뒤 돌아오지 못했다. 온유의 아버지는 이 교회의 관리직을 맡고 있었다. 매일 오후 8시면 이곳에선 세월호 참사 피해자를 위한 예배가 열렸다.
참사 이후에도 온유네는 여전히 이곳에 살았다. 아버지는 다른 유가족들과 합동분향소 앞 천막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남겨진 딸의 책상을 쓸어 보던 아버지는 “부모 걱정 한 번도 끼치지 않았던, 의젓하고 믿음직한 그런 애였는데…”라며 고개를 떨궜다.
집 안에만 있던 어머니는 이제 낮이면 가끔 집 밖을 나와 다니기도 하고 이웃들과 이야기도 조금씩 시작했다. 어머니는 이웃 분식집 아주머니와 앉아 있다가 눈물이 나면 거울을 보는 척하며 “아 눈이 왜이래…”라고 했다. 그러면 분식집 아주머니는 모른 척 일손을 다시 움직인다고 했다.
‘옷사랑 세탁소’는 희생 학생 전현탁 군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작은 세탁소 겸 편의점이었다. 문 앞에 있던 꽃다발과 노란 리본은 더이상 그 자리에 없었다. ‘현탁아 돌아와’라고 쓰여 있던 글귀도 사라졌다. 연락처만 메모지에 남긴 채 세탁소는 문을 닫아 걸었다. 현탁이가 끝내 희생된 것으로 확인된 뒤 어머니는 세탁소 안 쪽방에 누워 아무하고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웃 분식집 사장은 “가끔 불이 켜질 때도 있었지만, 문을 연다고 해도 아직은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닐 것”이라며 걱정했다.
“준혁아, 분식집 아주머니가 너 토스트 먹으러 오래.” 아침을 먹던 준혁이가 기자의 말에 살짝 웃었다. 함께 지낸 지 이틀째, 처음으로 건넨 말이었다.
‘놀러와 분식’은 단원고 앞에서 6년째 영업 중이다. 학교 인근에서는 가장 오래된 아이들의 군것질 장소다. 이곳을 운영하는 부부는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 중학교를 다니던 때부터 토스트 김밥 떡볶이를 팔아왔다.
오후 4시 반, 수업을 마친 아이들은 여전히 분식점을 찾아왔다. 부부는 2학년 명찰을 단 아이가 오면 토스트 값을 받지 않았다. 가게에는 희생된 3반 신승희 양이 참사 이전에 백일장에서 썼던 ‘항해’라는 제목의 시가 남겨져 있었다. “우리는 잔잔한 바다를 영원히 함께 항해하리…”라는 시구가 이젠 칼날처럼 남겨진 이들의 가슴을 후벼 팠다. 누군가가 손글씨로 다시 써서 단원고 앞 골목에 걸어두었던 시였다. 부부는 비를 맞고 귀퉁이가 찢어진 종이를 코팅해 가게 안에 간직했다.
4월 16일 이전, 점심 급식 메뉴가 별로인 날이면 가게는 학생들로 꽉 찼었다. 소풍이나 행사가 있는 날이면 부부는 새벽부터 아이들 김밥을 말았다. 선생님이 간식이라도 사는 날이면 교실까지 와플 수십 개를 배달했다. “수학여행 가던 날도 와서 떡볶이 시켜 먹고 떠들던 애들인데….” 주인아주머니는 말을 삼켰다. 사장님은 “사고 전에 최혜정 선생님이 밤늦게 버스 놓칠까 종종걸음으로 가는 걸 봤어요.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으면 내가 집에 태워다 줬을 텐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참사 이후 아이들의 빈자리엔 다른 손님들이 찾아왔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단원고 앞에 노란 리본을 매달고는 분식점에 들러 요기를 했다. 어느 날은 대구에서 새벽에 올라 왔다는 고등학생 남매가 라면을 시켰다. 또 어느 날은 못 보던 중년 부부가 구석에 앉아서 쫄면을 먹었다. 희생된 최혜정 교사의 부모였던 부부는 묵묵히 식사를 마친 뒤 “우리 혜정이 집에 잘 들어왔어요. 걱정 마세요,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주인아주머니는 “저희는 애들 이름은 다 몰랐지만 얼굴을 다 알잖아요. 합동분향소에 가면 걔들 이름을 다 알게 되는데… (마음이 아파서) 갈 수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희생자 최혜정 교사의 아버지는 14일 안산 트라우마센터에서 진단서를 받아오는 길에 분식점에 들렀다. “나는 최혜정이 아빠예요.” 땀범벅이 된 기자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냉커피를 시켜줬다.
최 교사의 집은 단원고에서 3km 떨어진 동네에 있었다. 아버지는 딸의 방을 아직 다 치우지 못했다. 침대에는 딸이 쓰던 이불이 깨끗하게 펼쳐져 있었지만 방바닥에는 싸다 만 짐 가방 서너 개가 널려 있었다. 거실 텔레비전 밑에는 딸의 사진이, 벽에는 학창시절 받았던 학업우수 상패가 걸려 있었다. “얼마나 꼼꼼하고 쾌활한 애였는데….” 아버지는 말끝을 맺지 못했다.
부임 2년 만에 참사를 당한 최 교사에게 남은 제자는 1학년 때 담임을 맡았던 아이 8명과 2학년 9반 아이 2명, 총 10명뿐이었다. 방에 남겨진 교무수첩에는 반 아이들마다 특별히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인지, 챙겨줘야 할 부분은 무엇인지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아버지는 희생된 9반 아이들의 학부모와 함께 아들딸 대신 까만색 9반 반티를 입었다. 티셔츠 등 쪽에 흰색으로 ‘9’자가 새겨지고 그 위에 까만 글씨로 ‘최혜정 선생님’과 아이들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유가족들과 함께, 아버지는 ‘반티’를 입고 전국 순회 버스를 타며 서명운동을 하고 국회 농성을 나갔다.
얼마 전 딸의 제자 10명을 모아 밥을 사 먹였다고 했다. 딸은 늦게까지 남은 아이들을 모아 분식점에서 와플을 사주곤 했다.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하고 큰사람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요즘 수업을 거의 안 듣는다는데… 걱정이에요. 내가 가서 잔소리라도 해주고 싶어요”라며 아버지는 쓸쓸히 웃었다.
등하교 시간이면 단원고 앞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순찰차 한 대가 서 있었다. 고잔파출소 직원들은 6월 말까지 24시간 순찰 체제였다. 최근 오전 10시부터 다음 날 오전 2시까지로 도보 순찰 시간이 짧아졌다.
참사 이후 얼마간 동네는 울분에 싸여 있었다. 밤이면 아들딸을 잃은 아버지들이 술에 취해 이성을 잃고 싸움이 났다. 손녀를 잃은 할머니가 울면서 대낮에 학교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친구를 잃은 남학생이 밤에 학교 앞에서 알 수 없는 소리를 오래도록 질렀지만 아무도 나와서 말리지 않았다. 수많은 신고에 파출소는 쉴 틈이 없었다. 아이들을 찾으러 부모들이 진도로 내려갔을 때 직원들은 텅 빈 집들을 찾아다니며 문에 붙은 전단을 떼고 쌓인 우편물들을 거둬 지키며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동네는 점차 안정을 찾아갔지만 파출소는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상시 순찰인력 13명에 순찰차 5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파출소장은 단원고 생존 학생들이 등교하던 날 학교 앞까지 찾아갔다고 했다. 이름도 모르는 아이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동네가 작으니까 애들이 ‘아저씨, 아저씨’ 하며 얼굴을 다 알아요… 이 동네 아무도 이게 시간이 지나면 슬프지 않을 거라고,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다들 그냥 익숙해지면서 이렇게 살아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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