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스케치]산골로 간 미술관… 함평 산내리의 변신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2일 03시 00분


“사진가 됐다가 시인 됐다가… 밭고랑 할매들 출세했소”

전남 함평군 해보면 산내리 할머니들과 잠월미술관 김광옥 관장(왼쪽)이 벽화를 보며 골목길을 한가롭게 걷고 있다. 골목길 벽화는 할머니들과 작가들이 함께 그렸다. 함평=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전남 함평군 해보면 산내리 할머니들과 잠월미술관 김광옥 관장(왼쪽)이 벽화를 보며 골목길을 한가롭게 걷고 있다. 골목길 벽화는 할머니들과 작가들이 함께 그렸다. 함평=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2014년 5월 14일. 밭을 매다가 파리(팔이) 아파 쉬여 안자서(앉아서) 뺑도리네 집 엽산(옆산)을 처다보이(쳐다보니) 아까시야(아까시) 꽃치(꽃이) 바람에 팔팔 날이은(날리는) 것슬 보이(것을 보니) 나도 한번 팔팔 나라가고(날아가고) 싶퍼요(싶어요).’

전남 함평군 해보면 산내리에 사는 정정옥 할머니(77)는 요즘 시 쓰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평생을 ‘까막눈’으로 살다 2년 전 글을 깨치기는 했지만 아직도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서툴기만 하다. 정 할머니는 어릴 적 아버지가 “딸은 시집가서 힘들면 친정으로 편지를 보내니 글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학교에 보내지 않아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세월’을 살아왔다고 했다. 그런 할머니에게 시는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눈이었다. 글을 몰랐던 시절 그냥 지나쳤던 나팔꽃, 봉숭아, 개망초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마을에서 할머니는 ‘산토끼’로 불린다. 걷는 모습이 깡충깡충 뛰는 토끼를 닮았다고 해서 얻은 별명이다. 그런 그가 12월이면 어엿한 시인으로 데뷔한다. ‘왕초’ ‘뺑돌이’ ‘억척이’ ‘열심이’ 등 별명을 가진 할머니들과 함께 그동안 쓴 시에 그림을 곁들인 ‘시화전’을 연다. “마을에 미술관이 있응께 늘그막에 별것을 다 해 본당께. 사진작가가 됐다가 도예가도 됐다가 인자 시인까지 된다고 하니 손주들도 놀래.”

시골마을에 둥지 튼 미술관

산내리는 20가구가 채 되지 않는 작은 산골 마을. ‘산의 안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처럼 야트막한 산들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다. 여느 시골과 마찬가지로 젊은 사람들이 빠져나가 마을에선 이장인 이광연 씨(57)가 가장 젊다.

쉬는 날이면 마을회관에 모여 심심풀이 화투나 치던 할머니들의 일상의 틀을 깬 것은 2006년 가을 마을에 둥지를 튼 ‘잠월미술관’이다. 김광옥 관장(57)과 아내 임혜숙 씨(54)는 한 해 전 산내리를 찾았다.

“처음 와 본 곳이었지만 고즈넉한 풍경이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이곳이라면 쉽게 뿌리를 내릴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퇴직 후 작품 활동을 하고 전시공간도 갖춘 작은 미술관을 갖는 게 꿈이었던 김 관장 부부는 퇴직금을 담보로 마을 한 귀퉁이에 미술관 터를 잡았다. 뒷산 자락이 누에(蠶)를 닮고, 앞산에 뜬 달(月)이 아름답다고 해서 ‘잠월미술관’으로 이름 지었다.

미술관이 들어선다고 하자 할머니들은 ‘별 이상한 사람들 다 있다’라는 반응이었다. 도시에서나 보는 미술관이 이런 시골구석으로 들어온다는 걸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 반면에 “노인네 냄새 풀풀 나는 마을에 젊은 사람 하나 들어오면 좋은 일 아니냐”며 반겨준 이들은 마을 할아버지들이었다.

김 관장 부부는 이 미술관이 주민과 뚝 떨어져 외지인만 들락거리고 작가들이 작품을 전시하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식으로 운영돼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시골 어르신의 삶과 일상이 녹아든 미술관, 평생 예술을 모르고 살아온 이들에게 아름다운 감성을 일깨워주는 미술관. 말로만 공동체를 외칠 것이 아니라 그들 속으로 들어가 고민하고 소통하는 공간을 꿈꿨다.

그래서 부부는 미술관을 지어놓고 전원생활의 호사를 누리는 것을 처음부터 포기했다. 아예 미술관 옆에 살림집을 차리고 광주에서 이곳으로 주소도 옮겼다. 중학교 미술교사인 부부는 광주에 있는 학교까지 차로 출퇴근하는 데 2시간 정도 걸리지만 개의치 않았다. 미술관 문턱도 낮췄다. 주민이 논일을 하다가 흙 묻은 옷차림으로 와도 미안해하지 않도록 미술관 바닥에 타일을 깔았다. 이웃집에 놀러가다 스스럼없이 찾아와 차 한잔 마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산내리 다방’이란 예쁜 간판을 걸었다.

마을 어르신들이 전시회의 주인공

산내리 장복님 할머니가 잠월미술관 내 공방에서 직접 도자기를 구워 집 앞에 내건 문패.
산내리 장복님 할머니가 잠월미술관 내 공방에서 직접 도자기를 구워 집 앞에 내건 문패.
김 관장은 마을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울력’에 빠지지 않고 나갔다. 여름철 오전 5시에 일어나 마을 풀베기 작업을 하고 나면 출근하기 힘들 정도로 몸이 처지지만 싫은 내색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몸으로 때우다 보니 효과가 있었다. 할아버지들은 퇴근하는 그의 손을 이끌어 막걸리 잔을 건넸고 할머니들은 손수 작물 키우는 법을 알려주는 등 부부를 ‘산내리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산내리에 예술의 옷을 입히는 ‘마을미술 프로젝트’의 첫 단추는 개관 이듬해인 2007년 ‘우리 마을 산내리전’이란 이름으로 끼워졌다. 추석 무렵 열린 전시회는 미술관이 뭔지도 모르는 마을 주민과 함께 처음으로 꾸민 자리라 의미가 남달랐다. 초청 작가들이 볕에 그을린 어르신들의 삶의 모습과 황금빛 곡식 물결이 출렁이는 마을을 화폭에 담아 전시했다. 주민들은 그해 수확한 쌀, 토란, 고구마 등 농산물을 ‘작품’으로 내놓았다. “관장님이 아무거나 가져와도 된다고 해서 쌀을 쪼께(조금) 가져갔는디 아따 그것을 포장한 게 볼만하더라고.” 박현구 할아버지(74)는 “예술이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1년 뒤 열린 산내리전은 주민들이 예술을 더욱 가깝게 느끼는 계기가 됐다. 8명의 작가가 마을에서 1박 2일을 머물며 주민과 하나가 됐다. 구불구불한 들길에서,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에서, 어르신들의 구수한 입담에서 잊혀가는 농촌을 담아내 보여줬다. 주민들은 미술관이 있으니까 젊은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사람 구경 하게 돼 좋다며 반색했다.

2010년 여름에 진행된 ‘헬로우 산내리 할매전’은 7명의 할머니가 주인공이었다. 미술관은 그해 6월 광주시청자미디어센터가 주관하는 미디어교육 운영기관으로 선정된 것을 계기로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사진교실을 열었다. 디지털카메라를 하나씩 받아 든 할머니들은 처음에는 어색해했지만 앵글 속에 비친 풍경이 신기한 듯 마을 곳곳을 다니며 셔터를 눌러댔다. 비 오는 날의 황토벽은 향수 어린 고향의 멋진 추억이 됐다. 담벼락 아래 소담하게 핀 들꽃과 마을 우물에 비친 하늘이 ‘작품’이 된다는 사실에 모두들 놀랐다. 김 관장은 할머니들의 사진이 너무 아까워 내친김에 사진전을 열었다. “처음에 영정사진을 찍어주는 줄 알았당께(알았어). 근디(그런데) 찍어 봉께로(보니까) 겁나게(정말) 재미지더라구(재미있더라). 전시회 때 아들 딸 손주까지 다 불러 제대로 폼 한번 잡았제.” 정앵순 할머니(78)는 지금도 사진기를 들고 다니며 마을의 소소한 일상을 담고 있다.

할머니들은 미술관 내 공방에서 직접 도자기를 구워 문패도 만들어 봤다. 평생 ‘○○댁’으로만 불렸던 할머니들의 이름이 할아버지 이름과 나란히 내걸렸다. 작가들과 함께 마을 담벼락에 알록달록 벽화를 그리고 천연염색도 배우면서 예술이 뭔지를 알게 됐다.

예술 의미를 일깨우는 문화사랑방


잠월미술관 앞뜰에서 산내리 주민들과 김광옥 관장(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이 손을 흔들고 있다. 8년 전 시골마을에 둥지를 튼 잠월미술관은 주민들에게 예술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문화 사랑방이다.
잠월미술관 앞뜰에서 산내리 주민들과 김광옥 관장(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이 손을 흔들고 있다. 8년 전 시골마을에 둥지를 튼 잠월미술관은 주민들에게 예술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문화 사랑방이다.
잠월미술관은 전시회를 열거나 미술관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하는 레지던스 작가들에게 특별한 ‘미션(과제)’을 준다. 마을에 예술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작품 하나씩을 남기라는 것.

전남 강진에서 청자 작업을 하는 작가는 연꽃, 학, 대나무 등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문양에 옻칠을 한 도예타일을 마을회관 현관에 설치했다. 작가의 작업을 도운 김현순 할머니(83)는 외지인이 오면 ‘큐레이터’로 변신해 타일 작품을 설명할 정도로 식견이 높다.

한 작가는 마을 정자 앞 공터에 설치된 초록색 플라스틱 재질의 쓰레기 분리수거함을 목재 예술품으로 바꿔놓았다. 멋진 펜션을 축소해 놓은 듯 보이는 분리수거함은 주민들이 쓰레기를 버리기가 아깝다고 말할 정도로 예쁘고 앙증스럽다. 정자 천장엔 흰 구름이 둥실 떠 있다. 작가들이 한지로 만들어 놓은 구름 작품 덕분에 주민들은 정자에 누워 하늘을 보는 ‘사치’를 누린다.

새로운 전시가 시작되는 날은 마을의 잔칫날이 된다. 이장은 신나는 트로트 음악을 틀면서 마을 방송을 하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미술관을 찾는다. 전시행사가 끝나면 마을회관에 모여 가마솥에서 푹푹 삶은 돼지고기와 쑥버무리, 모시떡에 막걸리를 곁들이며 작가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린다.

김 관장 부부가 매주 토요일 할머니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산내리 청춘학당’은 배움에 목말라하는 할머니들에게 옹달샘 같은 곳이다. 2012년 1월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3년째로 접어들었다. 배움터가 생긴 것은 3년 전 여름 찾아가는 예술 활동 프로그램인 ‘선돌 할매의 산내리 별곡’이 계기가 됐다. 마을회관 옆 바위에 꽃 그림을 그린 할머니들에게 ‘산내리 만세’라고 써보라고 했더니 “우리들 까막눈이여. 그림은 잘 그리는디 글씨는 못 써”라는 말을 듣고 청춘학당을 열었다.

할머니들의 배움에 대한 열정은 컸다. 시를 통째로 외우는 할머니, 폐암 말기인데도 광주에서 토요일이면 빠지지 않고 오시는 할머니를 볼 때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김 관장은 할머니들이 처음 써본 일기부터 자식에게 쓴 편지, 꽃 그림 등을 묶어 지난해 12월 ‘산내리 청춘학당전’이란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올해 말 열리는 시화전은 할머니들의 두 번째 개인전인 셈이다.

남들은 ‘부부 교사’라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미술관을 운영하는 줄 알지만 실상 가계부는 적자다. 미술관 입장료를 받지 않기 때문에 월급 대부분이 운영비로 나가지만 이들은 행복하다.

“어르신들은 고사리, 가지, 고추를 미술관 문 앞에 슬그머니 놓고 갈 정도로 인정이 넘칩니다. 그분들과 어울리면서 삶의 재미를 느끼고 예술의 참의미도 배우죠. 미술관을 아침 햇살처럼 따스한 문화 사랑방으로 가꾸고 싶어요.” 김 관장 부부의 소박한 꿈이 미술관 주위에 흐드러지게 핀 하얀 샤스타데이지를 닮았다.

함평=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함평#산내리#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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