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근대 사법제도가 도입된 지 120년째, 1948년 대한민국 헌법 공포로 대법원이 최고 사법기관이 된 지 66년째 되는
해다. 하지만 ‘사법개혁의 알파에서 오메가’로 불리는 대법원의 현실은 척박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국민 인권의 보루’로
거듭났으나 지금의 대법원은 ‘사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동아일보는 국민의 시각에서 대법원의 현실과 선진 사법제도를
진단하고, 미래의 바람직한 대법원의 길을 모색하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국민들이 책상에 가득 쌓인 기록을 보면 걱정할 것 같아 미리 치워뒀어요. 해결해야 할 사건이 너무 많아 숙고할 시간이 절대 부족합니다.”
지난달 30일 오후 3시 서울 서초구 대법원 7층. 사건 기록으로 가득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김소영 대법관(49·여)의 사무실이 깔끔하게 정리돼 있던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그는 역대 네 번째이자 최연소 여성 대법관이다.
11월이면 취임 2주년을 맞는 김 대법관은 인터뷰 내내 신중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현행 상고심 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그를 비롯한 전현직 대법관들로부터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대법관의 근무 실태를 들여다봤다.
○ “아무리 시간 투입해도 숙고할 시간이 모자라”
김 대법관의 일상은 매우 단순했다. 한 달에 한 번가량 열리는 전원합의를 제외하곤 오전 8시 반 무렵 출근해 줄곧 기록을 검토한다. 점심은 외부 일정이 없을 때는 대법관 3층 구내식당을 주로 이용한다.
최근 상고심 접수 사건은 연간 4만 건에 육박할 정도로 급증했다. 지난해 대법원에서 접수한 상고심 사건 수는 3만6110건으로 2002년(1만8600건)보다 두 배 가까이로 늘었다. 산술적으로 연간 대법관 1인당 약 3009건, 매달 250건, 주 6일을 근무해도 하루 평균 9.6건을 해결해야 한다. 이 때문에 각종 사건 자료들이 12명(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 제외)의 대법관실 탁자를 한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대법관실 한쪽에 마련된 응접탁자까지 점령한 지 오래다.
“대법관 근무는 ‘다시 한 번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것과 비슷하다’고들 합니다. 저 역시 사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을 쓰고 있습니다. 최종 판단을 해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 속에서 조금 더 생각하고 결정할 사건들이 있는데 이런 틈을 거의 주지 않고 매일 매일 사건이 올라오죠.”
사건 기록을 들고 출퇴근하는 일은 일상이 됐다. 보통 오후 8시경 퇴근할 때 일감을 보자기에 싸서 가져가 집에서 다시 기록을 검토한다.
그러다 보니 돋보기 하나로는 불편했다. 이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남편이 돋보기안경을 3개나 사줬다. 본의 아니게 가정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다. 그의 자녀들은 “주말에 단 2시간만이라도 우리를 위해 시간을 달라”고 조를 정도다.
김 대법관은 “주말에도 하루는 꼭 출근한다. 대법관 주차장은 일요일에도 절반 이상의 대법관 차량이 주차돼 있다. 이런 상태로는 2, 3년이 지나도 해결이 안 된 사건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지형 전 대법관은 “밤 12시까지 기록과 씨름하는 게 일상이었다”며 “혹자는 ‘재판연구관들이 일을 많이 해주지 않느냐’고 하지만 연구관이 생산한 보고서를 검토하는 일도 더욱 늘어난다”고 했다.
다른 대법관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한 현직 대법관은 토요일에 등산을 다녀온 날 저녁에도 다시 기록을 꺼내든다. 시간을 빼앗긴 만큼 보충을 하기 위해 일요일에도 출근한다고 한다. 집이 경기도인 한 대법관은 아예 출근 시간을 앞당겨 오전 7시경에 대법원에 도착해 업무를 시작한다.
○ 격무에 건강 이상…‘대병원’ 별칭까지
퇴임을 앞둔 대법관은 신임 대법관에게 축하를 전하면서도 “크게 봐야 한다. 그러려면 건강을 잃으면 안 된다”고 조언한다. 고된 업무 속에서도 몸을 챙기라는 얘기다. 김 대법관은 “최근 시력이 많이 나빠졌다. 요즘은 가끔 귀가 먹먹할 때가 있다”고 했다.
많은 대법관이 크고 작은 병으로 병원 신세를 지거나 수술을 받는다.
김 대법관도 근무 1년 만에 시력이 나빠졌다. 다른 현직 A 대법관은 재임 중 안경을 네 번이나 바꾸고 도수를 높여야 했다. A 대법관은 대상포진에 걸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고, 현직 B 대법관은 지난해 눈에 실핏줄이 터졌지만 한동안 충혈된 눈으로 출근해 기록을 검토해야만 했다.
비문증에 걸린 대법관도 적지 않다. 비문증은 눈 앞에 먼지나 벌레 같은 뭔가가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안과 질환.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이명뿐 아니라 어지럼증을 호소했던 전현직 대법관도 여럿이라고 한다. 건강이 좋은 사람이 거의 없어 대법원이 아니라 ‘대병원’이 될 지경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대법관들의 건강을 우려한 대법원 측이 대법관실에 운동기구를 마련해주기도 했지만 별 도움이 되진 않았다. 김 대법관은 행정처가 내실에 마련해 준 연습용 자전거를 한두 달간 매일 20∼30분 이용했지만 요즘은 시간이 부족해 그만뒀다.
김 대법관은 “(업무 도중 운동을 하면) 생각의 흐름이 끊긴다고 느껴지고 그만큼 결론을 내는 사건 수도 줄어드는 것 같아 잘 안 하게 됐다”며 “그 대신 가끔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수영을 하며 체력 관리를 한다”고 말했다.
○ 현행 상고심 제도에 대한 변화 필요 공감
김 대법관이 해결한 사건 가운데 정말 대법원에 올 만할 정도로 풍부한 법리 검토가 필요하다고 느낀 사건은 매달 20∼30건 정도다. 그는 “법률심이 원칙인 상고심에 올라온 사건에서도 따져보면 결국 ‘때렸다’ ‘안 때렸다’ ‘때렸지만 상처가 안 났다’는 등 사실관계만 다투는 사건이 많다”고 했다. 실제로 대법원의 파기환송률은 5∼7%대에 그친다.
사건이 폭주하다 보니 대법원장과 대법원 12명이 모여 합의하는 전원합의체를 활성화하기가 쉽지 않다. 김 대법관은 “소부(대법관 4인으로 구성된 소재판부)에서 선고한 사건 중 청소년 동성애 사건과 여교사 출산휴가 중 육아휴직 신청 사건 등은 사실 전원합의체에서 다뤄 봤으면 했던 사건”이라며 “전원합의는 1개 사건에 대법관 12명이 매달려야 하고 검토와 자기논리, 다른 사람을 설득할 논리까지 생각해야 하는 만큼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 대법관은 대법원이 전원합의체 판결을 중심으로 사회적 방향을 제시하는 정책법원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대법원에 사건이 많다는 걸 대외적으로 알리고 싶지는 않다”며 “하지만 현행 상고심 제도로는 정작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있거나 신속한 대응이 필요한 사건을 해결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지금의 대법원은 권리구제 기능과 정책법원 측면 모두 만족시키지 못하는 어정쩡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얘기다.
김 대법관과 별도로 인터뷰에 응한 전직 대법관 5명도 여기에 대체로 공감했다.
차한성 전 대법관은 “건국 초기 권리구제에 주요 역점을 뒀던 현행 사법시스템 체제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조금 더 선진화된 사법시스템을 모색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김용담 전 대법관도 “대법원의 힘은 ‘원 벤치(전원합의체)’에서 나온다”며 “한 개의 재판부에서 다양한 격론이 맞붙어야 의미가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전직 대법관은 “대법관들이 사건을 빨리 뗀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고, 대법관 부담을 덜어준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라며 “1, 2심 신뢰 방안을 비롯해 전체 사법 시스템에 대해 근원적인 접근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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