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오후 11시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의 ‘심야식당 시즌2’. 직장 동료이면서 같은 40대인 남성 1명과 여성 2명이 감자요리를 먹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대중교통이 끊길 시간인데 이들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남성이 얘기했다.
“집에서 애들 다 재우고 새벽 2시에 일어나 맥주 한잔 마실 때가 있지. 40대 가장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느낌이야. 심야식당에서도 그런 편한 느낌이 들어.”
맞은편 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어트해야 하는데…. 그래도 여기서는 야식을 먹어도 편한 느낌이야. ‘죄’를 같이 짓는 기분이랄까?”
한바탕 웃고 난 이들은 화제를 고민거리로 옮겼다. 남성은 사춘기를 맞은 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 같다고, 여성들은 “영어 공부가 잘 안된다” “돈이 안 모인다”고 한숨을 쉬었다. 해결 방법이라곤 그저 “건배!”를 외치는 것뿐이었다.
이들 주변에는 10여 명의 사람이 있었다. 모두가 음식을 먹으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손님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을 때까지 하라는 뜻으로 이곳은 다음 날 오전 5시까지 영업을 한다. 최근 이태원을 비롯해 홍익대 앞, 청담동, 대학로 등을 중심으로 새벽까지 깨어 있는 식당이 늘고 있다. 이들은 한 끼 식사가 될 만한 요리 위주의 메뉴를 내놓는다는 점에서 술집과는 다르다.
●집
같은 시간, 부산 동래구의 한 아파트. 부부 한 쌍이 음식을 먹고 있다. 남편인 강형석 씨(32)가 직접 만든 메뉴는 ‘버터 바른 새우구이’. 아내 황주연 씨(30)가 “소금을 왜 이렇게 많이 넣었냐”며 핀잔을 주자 남편은 “지난번 요리보다는 낫지 않으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강 씨와 황 씨는 올해 초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서로에게 야식을 해주고 있다. 2년 전 결혼 후 맞벌이로 서로 바쁘게 살다 보니 평일에 식사 한번 같이하기 어려워졌다. 시간이 나더라도 서로 피곤해 치킨, 피자 등 배달 음식을 자주 시켜 먹었다. 살이 찌는 것보다 걱정됐던 것은 대화할 시간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서로에게 요리를 해주자는 남편의 제안에 황 씨는 처음엔 번거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함께 요리를 하며 대화하고 싶다”는 남편의 얘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부부는 야식을 ‘소통’이라고 말한다. 강 씨는 “늦은 밤 요리를 함께 먹으며 서로의 고민이나 관심사를 알아간다”고 말했다. ▼ 야식 공화국… 3명중 1명꼴 “1주일에 2회이상 꼭 챙겨” ▼
Chapter 1. “야식은 깨어 있는 사람들의 세레나데” 야식의 사회학
예전에는 밤이 ‘정지’를 의미했다. 밤은 잠자는 시간이었지만 지금은 음식을 먹는 것이 흔한 풍경이 돼버렸다. 이태원 ‘심야식당 시즌 2’를 운영하는 요리사 권주성 씨(43)는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다양해지면서 밤을 활용하는 방식이나 식생활 등이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정확한 통계 수치는 없지만 우리나라의 야식 시장 규모는 외식업계 추산으로 10조∼15조 원 정도다. 이는 통계청이 발표한 우리나라 전체 외식 시장 규모(77조 원)의 12∼19% 수준이다. 배달 야식 메뉴로 가장 인기 있는 치킨의 경우 전체 주문량의 약 50%가 오후 8시부터 밤 12시까지 4시간 사이에 몰린다. 국내 전체 치킨 판매액(2조6000억 원·2012년 기준) 중 절반인 1조3000억 원이 야식 매출인 셈이다.
야식산업 및 문화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82년 ‘통행금지 해제’ 이후부터다. ‘대한민국 치킨전’을 쓴 정은정 씨는 “그 당시 직장 및 공장 주변에 각종 음식점과 술집이 들어섰고 이때부터 사람들이 밤늦은 시간까지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페리카나, 처갓집양념치킨, 이서방치킨 등 양념치킨을 주제로 한 치킨 브랜드들이 잇달아 생겨난 것도 이 무렵이다. 1990년대 초에는 ‘밤에 음식을 배달해준다’며 배달 전문 야식업체들이 생겨났다. 야식문화가 대중화되는 데에는 2000년대 맥도날드 등 패스트푸드점을 중심으로 시작된 ‘24시간 영업’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후 고깃집이나 설렁탕 가게 등 프랜차이즈 업체부터 심야식당을 표방하는 개인 음식점까지 밤늦도록 영업을 하는 자영업자들이 생겨나면서 배달 위주였던 국내 야식시장이 커질 수 있었다.
야식시장의 발전은 메뉴의 다양화를 가져왔다. 파스타 요리만 전문적으로 파는 심야식당이 생기는가 하면 최근에는 1인 가구나 싱글족을 겨냥해 집에서 스스로 해먹는 1인용 야식도 인기를 얻고 있다. ‘2000원으로 밥상 차리기’를 주제로 메뉴를 개발하는 ‘이밥차요리연구소’의 노애리 수석연구원은 “가족이 함께 먹던 야식이 가족 단위가 작아진 지금은 ‘나’를 위한 것으로 바뀌었다”며 “내가 좋아하는 식기에 내 손으로 야식을 만드는 것에 사람들이 만족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프랜차이즈나 자영업자 위주였던 야식시장에 최근에는 대기업도 뛰어들었다. 신세계백화점은 지난달 본점 지하 식품관을 재개관하면서 요리사가 통닭이나 크로켓, 리소토 등 인기 야식 메뉴를 즉석에서 만들어 주는 ‘그래머시홀’을 만들었다. 웨스틴조선호텔은 고객에게 밤에 해물라면이나 샌드위치 등을 제공하는 야식 패키지 상품을 19일부터 판매하고 있다.
경쟁 사회가 만들어낸 문화
전문가들은 한국의 야식문화를 ‘전례 없는’ 것으로 평가한다. 그 이유로는 성장 위주, 경쟁 등으로 대표되는 한국 특유의 사회구조를 꼽는다. 요리연구가 이미경 씨는 “좁은 땅에서 경쟁상대는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밤늦게까지 일을 하게 됐다”며 “치열한 사회구조나 생활방식이 야식을 먹도록 바꾼 것”이라고 말했다. 옆집보다 수익을 더 내기 위해 영업시간을 연장하는 등 자영업자들의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게임 개발업체인 NHN엔터테인먼트는 야근이 잦은 게임 개발자들을 위해 요리사가 라면과 도시락을 만들어 주는 포장마차 형태의 식당을 평일 오후 10시부터 다음 날 오전 2시까지 운영하고 있다. NHN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어차피 야근을 해야 한다면 밖에서 사먹지 말고 사내에서 공짜로 먹으라는 취지”라며 “시간 절약 및 일의 능률 향상 등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문화적인 관점에서 야식을 접근하려는 시도도 나타난다. 케이블 방송에서는 미남 요리사가 야식을 만드는 프로그램을 방영하기도 했다. 온라인에서는 자신이 먹는 음식을 실시간으로 생중계하는 이른바 ‘먹방(먹는 방송)’이 유행하고 있다. 한 인터넷 방송 채널에서는 하루에 이 방송을 하는 사람만 수백 명에 이를 정도다. 사회학자들은 먹방의 인기에 대해 “야식을 매개체로 인간관계를 맺으려는 사회활동”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반면 한 해외 언론은 이를 관음문화가 결합된 ‘푸드 포르노’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여준상 동국대 교수(경영학)는 “싱글족이나 1, 2인 가구 등 소규모 가족 형태가 많아지고 있고 편리하거나 간편한 것을 추구하려는 젊은층이 있는 한 야식시장에 대한 전망은 대체로 밝은 편”이라고 말했다. Chapter 2. 즐겨 먹는 야식은 10명 중 8명이 “치킨” 야식을 사랑하는 한국인들의 마음은 야식 섭취 ‘횟수’로 나타났다. 동아일보와 시장조사 전문 업체인 ‘마크로밀엠브레인’이 5일 소비자 1000명을 대상으로 야식을 주제로 한 설문 조사를 벌인 결과 10명 중 5명 이상(53.1%)은 최소 1주일에 한 번 이상 야식을 먹는다고 답했다.
남자는 ‘친목’, 여자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즐겨 먹는 야식으로는 10명 중 8명이 압도적으로 치킨을 꼽았다. 이어 라면(37.4%), 과자·빵(33.3%), 족발·보쌈 등 돼지고기(32.9%) 순으로 나타났다. 치킨과 함께 배달음식의 대표로 여겨지는 중국음식의 응답률은 4.8%에 그쳐 중국음식은 밤보다 낮에 더 많이 선호되는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야식을 먹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냥 먹는다’처럼 습관적이라는 응답이 전체의 27.8%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사람들과의 친목이나 단합을 위해 먹는다’는 의견(20.6%)이 그 뒤를 이었다.
특이한 점은 여성들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먹는다’는 의견이 17.9%로 남성 응답률(9.5%)의 배 가까이 높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양요한 마크로밀엠브레인 상무는 “야식을 통해 얻고자 하는 효용이 남녀 간에 차이가 있음을 나타내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남녀의 차이는 야식을 고를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서도 나타났다. 남녀 모두 가장 중요한 것은 ‘맛’(64.0%)이라고 답했지만 그 다음 고려 사항으로 남성은 가격(15.5%), 여성은 칼로리(11.0%)를 각각 꼽았다.
야식 섭취 시간은 주로 잠자리에 들기 2시간 전인 경향이 강했다. 예를 들어 밤 10∼12시 잠자리에 들 경우 오후 8∼10시에 야식을 먹는다는 응답이 52.5%로 가장 높았다.
응답자들은 고칼로리 위주의 야식 때문에 건강이 염려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야식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설문에 61.1%가 ‘건강이 (약간 혹은 매우) 나빠졌다’고 답했다. 건강이 좋아졌다는 대답이 3.4%인 것과 대조적이다.
온라인에서 야식은 ‘부정적’ 이미지
야식에 대한 소비자들의 우려는 온라인 ‘빅 데이터’ 분석에서도 나타났다. SK텔레콤의 자회사인 SK플래닛 광고부문이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뉴스 사이트를 비롯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블로그 등에서 야식과 관계된 자료 14만3748건을 분석한 결과 ‘음식’ 다음으로 많이 언급된 주제는 건강과 관련된 것이었다. 다이어트(4289건)가 가장 많았고 운동(4128건), 건강(3506건), 관리(946건) 등이 그 뒤를 이었다. 특히 야식과 관련해 누리꾼들은 온라인에서 부정적인 단어를 자주 언급했다. 1000건이 넘게 언급된 부정적인 단어는 걱정(1835건), 후회(1834건), 고민(1824건), 스트레스(1525건), 부담(1033건) 등 5건이나 된다. 이번 조사를 담당한 김현철 SK플래닛 광고부문 국장은 “누리꾼들이 야식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부정적인 단어를 언급하면서 걱정을 덜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온라인에서 야식 관련 단어들이 가장 많이 언급되는 날은 의외로 주말보다 평일이 더 많았다. 목요일(2만3452건)이 가장 많았으며 수요일(2만2805건), 월요일(2만934건) 순으로 나타났다. 금요일은 4위에 그쳤으며 토요일은 평일보다 낮게 나왔다. ▼ 야식도 한류… 이슬람 국가에 ‘라마단 세트’까지 수출 ▼
중국엔 ‘치맥’ 이어 떡볶이 열풍… 심야 김치찌개 포장마차도 인기 KFC-맥도널드와 야간매출 경쟁… 영국엔 ‘강남 통닭’ 메뉴까지 등장
Chapter 3. 중국인 식습관까지 바꿔
지난달 29일 오후 9시 반 중국 상하이 쉬자후이(徐家匯) 정다(正大) 지역 내 한 쇼핑몰 1층. 한국 치킨 브랜드 ‘BBQ’ 매장에 20대 여성 2명이 들어왔다. 이들은 한국어로 “치킨 한 마리”를 외쳤다. 가게에 흘러나오는 케이윌과 효린 등 한국 가수들의 노래도 따라 불렀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를 통해 치킨을 알았다”는 이들은 “일주일에 한두 번씩 밤에 치킨을 먹으러 온다”고 말했다. 이 쇼핑몰 내에 입점한 BBQ 매장은 지난해 6월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이 매장의 한 달 평균 매출은 약 30만 위안(약 5075만 원)으로 쇼핑몰에 입점한 전체 외식 매장 중 ‘톱10’ 안에 들 정도다.
한국 드라마 보며 늦게 자는 사람들이 주 고객층
BBQ치킨은 2003년 중국 시장에 진출했다. 당시만 해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중국인들은 밤에 음식을 먹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형석 제너시스BBQ 중국법인장은 “최근 밤에 한국 드라마를 온라인에서 내려받아 보는 20, 30대 젊은층을 중심으로 배달 건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제너시스BBQ는 직영점과 가맹점을 합쳐 중국에서 150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 법인장은 “아파트를 중심으로 전단을 돌리고 배달 전문 매장을 내는 등 배달 사업을 확대해 중국에 매장 1만 개를 내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현재 한국의 야식이 가장 각광받는 곳은 중국이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여주인공인 전지현이 치킨과 맥주를 먹는 장면이 나간 후에는 ‘치킨=한류 야식 상품’이 되다시피 했다. 중국의 대표 맛집 정보 사이트인 ‘다중뎬핑(大衆点評)’에는 즉석 떡볶이나 닭갈비 등 한국의 야식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소개되고 있다.
정연수 KOTRA 상하이무역관 과장은 “한류 콘텐츠가 인기를 얻으면서 한국의 야식을 받아들이는 중국인들의 태도가 개방적이고 긍정적으로 바뀐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한국 ‘밤문화’의 상징인 포장마차도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 훙취안루(虹泉路)와 구베이(古北) 등 한인 밀집지역에는 야식과 술을 파는 실내 포장마차 10여 곳이 오전 1∼2시까지 손님을 맞고 있다. ‘7080’ 통기타 음악이 흐르는 ‘치맥(치킨과 맥주)집’부터 김치찌개와 부대찌개를 파는 찌개 전문 포장마차 등 콘셉트도 다양하다. 훙취안루 인근에서 떡볶이 가게를 운영하는 한 교민은 “올해 초만 해도 포장마차를 찾는 손님 대부분이 한국인이었는데 이제는 중국인도 많이 찾는다”며 “덩달아 떡볶이를 먹으러 오는 중국인도 늘었다”고 말했다. 포장마차가 인기를 얻자 일부 지역에는 노점 형태의 무허가 포장마차들도 생겼다. 중국 공안은 지난달 초 무허가 포장마차에 대한 일대 단속을 벌이기도 했다. 이슬람 국가에 내놓은 야식 세트
‘길거리 양꼬치 구이’로 대표되던 중국의 야식 시장은 최근 급변기를 맞고 있다. 세계적인 패스트푸드 업체인 KFC가 ‘30분 내로 배달합니다’라며 배달 서비스를 시작했고 맥도널드는 24시간 영업을 하는 등 밤늦게까지 깨어 있는 젊은층을 공략하기 위한 업체들의 각축전이 한창이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야식 업체들도 진출 이래 가장 바쁜 날을 보내고 있다. 닭갈비나 감자탕, 불닭발 등 한국식 매운맛 메뉴들도 인기를 얻을 정도다. 상하이 훙쑹루(紅松路)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최경수 씨(56)는 “한국에 여행가서 야식을 먹어 본 경험이 있는 중국인 손님들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하루 평균 매출은 1만8000위안(약 300만 원)으로 2년 전의 3배로 늘었다. 최 씨는 최근 배달 서비스 도입도 검토하기 시작했다.
중국 이외의 나라에서 해당 국가의 종교나 문화에 맞춘 제품으로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업체도 있다.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CJ푸드빌은 이슬람 국가의 최대 명절인 ‘라마단’ 기간(이슬람 국가에서 행하는 한 달 동안의 금식기간)에 낮 동안 끼니를 거른 인도네시아인들을 겨냥해 해산물과 쇠고기, 치킨을 섞은 야식 세트를 내놓았다. 이 회사는 또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영국에서 프라이드치킨을 ‘강남 통닭’이라는 이름으로 판매하고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