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의 최후는 항복 아닌 항전”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24일 03시 00분


공주 공산성서 목곽창고 원형발굴

공주 공산성 공북루 성벽 안 저수지 터에서 발견된 백제 갑옷(위 사진). 중국 당나라에 파견된 백제 관직명이 새겨진 이 갑옷은 백제가 항전 의지를 다지기 위해 저수지에 수장시킨 의례용 갑옷으로 보인다. 음식 저장고로 추정되는 목곽고(아래 사진 왼쪽)와 거기서 발견된 유물과 씨앗들. 문화재청 제공
공주 공산성 공북루 성벽 안 저수지 터에서 발견된 백제 갑옷(위 사진). 중국 당나라에 파견된 백제 관직명이 새겨진 이 갑옷은 백제가 항전 의지를 다지기 위해 저수지에 수장시킨 의례용 갑옷으로 보인다. 음식 저장고로 추정되는 목곽고(아래 사진 왼쪽)와 거기서 발견된 유물과 씨앗들. 문화재청 제공
충남 공주시 공산성 공북루 성벽 바로 안쪽에서 거대한 흙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옆에 8m가량 파고 들어간 흙구덩이에서 백제 옻칠 갑옷과 마갑(馬甲), 칼, 화살촉 등이 오랜 세월을 건너 모습을 드러냈다. 정확히 1354년 전인 서기 660년 이곳은 10m 너비의 저수지였다. 당시는 백제 의자왕이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쫓겨 수도 사비성을 버리고 공산성으로 피신해 최후의 결전을 벌일 때였다. 이런 급박한 때 누가, 무슨 연유로 7세기 최고급 사치품인 옻칠 갑옷을 저수지에 빠뜨린 걸까.

문화재청과 공주대박물관이 23일 공개한 공산성 성안마을 발굴 유물들은 패망 직전 백제의 마지막 항전 장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저수지 근처에서는 가로 3.2m, 세로 3.5m, 깊이 2.6m의 대형 목곽고(木槨庫)도 발견됐다. 부여 사비도성 등에서도 백제 목곽고가 발굴됐지만 이번처럼 원형이 그대로 유지된 건 처음이다. 목곽고에선 복숭아씨와 박씨, 무게 추, 칠기 등이 나왔다.

수백 개의 화살촉이 저수지와 목곽고 모두에서 나왔고 주변 건물 잔해는 대부분 불에 탄 흔적이 있다. 이 때문에 ‘의자왕이 태자와 웅진방령군을 거느리고 성에서 나와 항복했다’고 기술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통설과 달리 의자왕이 마지막까지 저항했다는 해석이 제기됐다. 이현숙 공주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삼국사기는 신라의 관점에서 쓰인 ‘승자의 역사’였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옻칠 갑옷 유물은 백제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대도(大刀)와 장식도(裝飾刀), 갑옷, 마갑 순으로 가지런히 놓인 채 발견된 유물들은 백제가 ‘임전무퇴’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의례를 치른 것으로 추정된다. 3년 전에도 인근에서 비슷한 모양의 갑옷 유물이 발굴됐다. 이남석 공주대박물관장(발굴단장)은 “두 갑옷이 동시에 함께 쓰인 의례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며 “고대 중국에서도 군대 출정 전 연못에 갑옷을 빠뜨리는 의례를 한 기록이 있다”고 말했다.

특히 3년 전 발굴된 갑옷에는 당나라 연호인 ‘정관(貞觀) 19년’(서기 645년)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번에는 ‘참軍事, ○作陪戎副, ○人二行左, 近趙○(참군사, ○작배융부, ○인이행좌, 근조○)’라고 적힌 파편이 추가로 발견됐다. 참군사나 배융부는 중국식 관직명으로 조공외교의 예에 따라 당나라에 파견한 백제의 외교사절을 지칭한 용어로 보인다.

이 관장은 “갑옷과 함께 묻힌 칼이나 깃대꽂이 등이 모두 백제산인 점과 당시 정황을 고려할 때 먼저 발굴된 갑옷도 백제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공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의자왕#공주 공산성#목곽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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