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운전자 200만명… 치매환자 10명중 1명 ‘위험한 질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2일 03시 00분


[시동 꺼! 반칙운전/시즌2]
돌발상황 대처능력 떨어져 ‘아찔’, 사고 年15% 급증… 치사율, 전체 1.7배
서울 개인택시기사 30% 65세 이상… 면허갱신기간 단축-적성검사 강화해야

《 “아저씨! 아저씨! 벽에 부딪혀요. 벽에….” 지난달 19일 오후 6시 30분경 부산 사하구 장림동의 한 아파트 앞 내리막길을 달리는 마을버스 안에서 겁에 질린 승객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가파른 ‘S자’ 내리막길을 50m 이상 미끄러져 내려온 버스는 중앙선을 넘어 반대편 방향에서 올라오는 자동차와 충돌하고 아파트 주차장 입구 벽에 부딪힌 뒤에야 ‘공포의 질주’를 멈췄다. 이 사고로 마을버스 승객 2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보행자가 있었다면 대형 인명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던 아찔한 순간이었다. 사고를 낸 마을버스 운전기사 김모 씨(70)는 경찰조사 중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분석 결과 이상이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김 씨가 내리막길 급가속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운전 감각을 잃고 제동장치를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  

○ 손 놓고 맞이한 고령운전자 200만 시대


지난해 187만 명이었던 65세 이상 고령운전자 수가 올해 200만 명(8월 기준 209만3034명)을 넘어섰다. 전체 운전면허 소지자 중 고령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2009년 4.6%에서 2014년 7.1%(8월 기준)로 증가해 고령운전자의 수와 비중이 빠르게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령운전자의 교통사고 건수도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다. 전체 교통사고 발생건수는 2012년 22만3656건에서 2013년 21만5354건으로 3.7% 감소했지만 고령운전자 교통사고는 같은 기간 1만5176건에서 1만7549건으로 15.6% 증가했다. 고령운전자 교통사고의 치사율은 4.2%로 전체 교통사고 치사율(2.4%)보다 크게 높다. 이는 모든 연령대를 통틀어 가장 높은 수치다.

특히 택시나 버스와 같은 사업용 차량 운전기사 중에 고령운전자가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현재 서울시 개인택시 운전기사의 29.5%와 마을버스 운전기사의 16.1%가 65세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개인택시 운전기사 중 80세 이상도 71명에 달했다.

전문가들은 고령운전자가 비고령자에 비해 운전 시 필요한 인지능력이 저하되고 돌발상황에 대한 반응속도가 늦어져 상대적으로 더 많이 사고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지적했다.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가 실시한 고령운전자 교차로 모의주행 실험 결과, 좌회전 결정까지 소요 시간은 65세 이상은 평균 15.79초로 25세 이하 실험자(10.81초)보다 5초가량 오래 걸려 교통상황에 대한 판단이 늦는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김인석 박사는 “실험을 통해 고령운전자의 거리나 속도 추정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게 확인됐다”며 “65세 이상 고령운전자의 교통사고는 위험 지각에 따른 반응시간 지연 등 노화와 관련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운전면허 갱신 시기 단축 및 적성검사 강화해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65세 이상 치매환자 10명 중 1명꼴로 직접 운전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고 위험이 높은 치매 환자의 운전을 그대로 방치할 정도로 우리나라의 고령운전자 교통안전 대책은 열악하다.

같은 고령운전자라고 하더라도 운전 감각이나 건강 상태는 개인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전문가들은 고령운전자들이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운전이 어려운 고령운전자를 판별하고 고령운전자 스스로 안전을 확보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면허 갱신 시 교통안전교육을 실시하고 인지적성검사 등을 통해 운전 적합 여부를 판단하는 방안이 대표적이다. 설재훈 한국교통연구원 교통안전재난연구단장은 “고령자 교통사고가 계속 늘어나는 가장 큰 이유는 고령자를 위한 교통안전교육과 검사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건강검진이나 인지적성검사 등 고령자가 스스로 운전 적합 여부를 판단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경찰은 지난해 8월부터 65세 이상 고령운전자를 대상으로 인지지각검사(CPAD)와 교통안전교육을 받아 이수하면 자동차 보험료를 5% 인하해 주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시행 1년이 지났지만 검사를 받은 운전자 수는 1600명 남짓이다.

○ ‘실버마크’ 보이면 양보와 배려를

지난달 19일 부산 사하구 장림동의 한 아파트단지 내리막길에서 70대 운전기사가 몰던 마을버스가 마주오던 자동차와 부딪힌 뒤 아파트 주차장 벽을 들이받아 26명이 다쳤다.
지난달 19일 부산 사하구 장림동의 한 아파트단지 내리막길에서 70대 운전기사가 몰던 마을버스가 마주오던 자동차와 부딪힌 뒤 아파트 주차장 벽을 들이받아 26명이 다쳤다.
대한노인회는 올해 9월부터 경찰과 함께 고령자의 개인 보유 차량에 고령운전자를 나타내는 ‘실버마크’ 부착 캠페인을 펼쳤다. 이 캠페인의 취지는 추월·경적 등 위협운전으로부터 고령자를 보호하는 교통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다. 이심 대한노인회 회장(75)은 “젊은 운전자들은 앞에 실버마크를 부착한 차량이 있으면 조금 더 조심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고령자들은 실버마크를 달고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서행한다는 이유로 경적을 울리거나 난폭하게 추월하면 노인뿐 아니라 어떤 운전자라도 당황하게 되고 그만큼 사고 위험에 노출된다는 게 전문가의 의견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교통안전문화본부가 고령운전자 8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고령운전자 사고를 줄이기 위해서는 고령운전자 배려 의식개선 캠페인이 시급하다고 응답한 비율이 39.8%로 가장 많았다. 김용수 서울시모범운전자연합회 사무국장(60)은 “빠르게 달리려는 젊은 운전자들이 고령운전자들을 부모라고 생각해 조금만 양보하고 배려한다면 고령자 교통사고도 훨씬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 日 75세 이상땐 인지검사 의무화… 자발적 면허반납 유도
濠 80세부터 시력-청력 증명서 제출… 85세땐 주행 평가 ▼

선진국 고령자운전 대책 매우 엄격… 美 “면허갱신때 州별로 정신검사”


한국의 고령자 인구 10만 명당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30.5명으로 미국(13.0명) 일본(9.3명) 호주(7.3명) 등 다른 국가보다 많다. 이 국가들은 일찌감치 고령운전자를 위한 교육 강화 및 면허제도 내실화를 시행해 왔다.

일본은 70세를 기준으로 연령별로 운전면허 유효기간에 차이를 뒀다. 70세 미만은 유효기간 만료 후 5년(최초 갱신은 3년), 70세는 4년, 71세 이상은 3년으로 규정하고 있다. 2002년부터 70세 이상 운전자가 면허를 갱신하기 위해서는 고령자의 신체기능 저하가 운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이해시키는 강의를 의무적으로 듣게 했다. 75세 이상 운전자에게는 운전에 필요한 기억력 판단력 등에 관한 인지기능검사를 의무화했다. 검사 결과 인지 저하가 확인되면 전문의에 의한 적성검사를 다시 받게 한 뒤 그 결과에 따라 면허 유지 여부를 결정한다. 상품권이나 1년분 승차권 등 혜택을 부여해 고령자의 자발적인 면허반납을 이끌어내는 운전면허 자진반납제도도 1998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미국도 주별로 면허 갱신주기를 단축하거나 추가 검사를 실시한다. 갱신 시 운전에 부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사람은 주 면허 당국에서 신체 또는 정신 검사를 받도록 하거나 표준면허시험(시력검사, 필기·주행시험)을 다시 보게 할 수 있다. 특히 고령운전자 교육프로그램이 활성화돼 고령운전자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두드러진다.

호주의 고령운전자는 80세부터 해마다 시력 청력 및 각종 의학검사 결과가 담긴 의료증명서를 면허관리청에 제출해야 한다. 85세부터는 매년 실제 도로주행 능력까지 평가해 합격해야만 운전을 계속할 수 있다. 뉴질랜드는 운전자가 80세가 되면 면허가 자동 말소된다. 운전을 계속하기 위해선 2년마다 의사로부터 운전면허를 위한 건강검진을 받고 별도의 주행시험도 통과해야 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65세 이상 고령운전자에 대해 적성검사 기간을 5년 간격으로 단축한 것 외에는 별다른 조치가 없다. 적성검사 시 단순히 시력 및 신체동작 기능 정도를 검사하는 현행 방식으로는 노화에 따른 기능 저하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

권오혁 기자 hyuk@donga.com
#치매환자#실버마크#양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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