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임형주의 뮤직 다이어리]은퇴를 모르는 ‘영원한 디바’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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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면 노래, 연기면 연기… 美 만능 연예인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전설의 뮤지션들 ③

2009년 9월 발매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63번째 정규앨범 ‘Love Is the Answer’. 팝의 여제로 불리는 그녀는 70세가 넘은 현재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DB
2009년 9월 발매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63번째 정규앨범 ‘Love Is the Answer’. 팝의 여제로 불리는 그녀는 70세가 넘은 현재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임형주 팝페라테너
임형주 팝페라테너
‘팝의 여왕’으로 불리는 마돈나, ‘세계 3대 팝디바’로 평가되는 휘트니 휴스턴, 머라이어 캐리, 셀린 디옹, 거기에 최근 지구촌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팝의 슈퍼우먼’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비욘세, 그리고 ‘21세기형 팝스타’ 레이디 가가, 케이티 페리까지 팝 음악계에는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여성 솔로 가수들이 존재해 왔습니다.

이 쟁쟁한 팝음악계의 여제들 중에서 빌보드 역사상 여성 솔로가수 역대 앨범차트 1위 기록의 보유자이자 메가톤급 커리어를 자랑하는 오늘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오늘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찬란한 인생을 조명해볼까 합니다.

○ 매부리코 소녀에서 ‘신이 내린 목소리’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1942년 4월 24일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일찍이 아버지와 사별하고, 어려서부터 생활고를 겪으면서 컸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노래와 연기를 발판으로 장차 스타가 되기를 꿈꿉니다. 그리하여 18세 때 뉴욕에 있는 한 유명 나이트클럽에서 열린 콘테스트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한 후 뮤지컬 배우로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많은 이들이 그녀의 매부리코와 강한 인상을 지적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그런 것들을 상쇄하고도 남을 신이 주신 뛰어난 목소리와 재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던 1962년 ‘Needles & Pins’란 작품으로 미국 브로드웨이 무대에 진출함으로써 뮤지컬 배우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고, 이후 1963년 당시 최고의 음반사였던 컬럼비아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데뷔 앨범 ‘The Barbra Streisand Album’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 앨범이 미국 빌보드 앨범차트 상위권에 랭크되어 성공적인 데뷔를 하게 됩니다.

그러던 1964년 그녀는 자신의 음악 인생의 최대의 전환점이 될 운명적인 작품 ‘Funny Girl’을 만나게 되고 여주인공 자리를 꿰차게 됩니다. 또한 같은 해 9월 정규 4집 앨범 ‘People’을 발표하며 생애 처음으로 빌보드 앨범차트 1위에 오릅니다.

이후 발표한 그녀의 앨범들 모두가 큰 성공을 거두었고, 1968년 여주인공으로 열연했던 뮤지컬 작품 ‘퍼니 걸’의 영화화를 계기로 영화배우로도 데뷔하게 됩니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도 굉장한 호연을 펼쳐 1969년 제41회 아카데미상에서 여우주연상까지 수상하는 ‘행운’을 누립니다.

○ 전방위적 활약을 펼친 ‘여장부’!

그녀의 놀라운 활약은 1970년대에도 쭉 이어졌는데요, 1973년 할리우드 미남배우 로버트 레드포드와 함께 호흡을 맞췄던, 인기영화 ‘추억’으로 당시 최고의 흥행성적을 기록하고, 영화와 동명의 주제곡인 ‘The Way We Were’가 또다시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오르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게 됩니다. 이뿐만 아니라 1976년에는 영화 ‘스타 탄생’의 러브테마곡 ‘Evergreen’(1977년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1위)으로 그래미상은 물론이고 1977년 제49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여성 작곡가로는 최초로 최우수 주제가상 부문을 수상하는 등 다방면으로 재능을 발휘하였지요.

이후에도 그녀는 1979년 영화 주제곡 ‘Main Event’로 100만 장(밀리언셀러)을 기록하고 당시 최고의 디스코그룹으로 명성을 떨치던 ‘비지스’의 멤버 배리 깁이 제작해 준 앨범 ‘Guilty’로 그래미상 최우수 듀오 부문을 수상하지요.

그녀는 이러한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여러 분야에 거침없는 도전을 감행하는데, 1983년에는 영화 ‘옌틀’로 영화감독으로 데뷔합니다. 이 작품은 학문의 열망을 위해 자신의 신분을 숨긴 유대인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내용으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출신을 강점으로 활용해 여성 감독으로는 사상 최초로 미국의 골든 글로브 영화상 시상식에서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합니다. 이후 아카데미상 시상식 최우수 감독상 후보에 오른 ‘사랑과 추억’(1991년), ‘로즈 앤 그레고리’(1996년)을 연출하며 영화감독으로서도 성공적인 활약상을 보여주었지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부부와 오랜 기간 두터운 친분을 이어오고 있는 그녀는 전 세계가 알아주는 사회운동가이자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폴리테이너’이기도 합니다. 50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반듯한 사생활로 큰 스캔들 없이 올곧은 삶을 살아온 그녀의 모범적인 모습은 전 세계 수많은 팬과 대중들에게 큰 감명을 주고 있어요.

○ 은퇴를 모르는 영원한 현역!

이렇듯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노래, 연기, 작곡, 연출, 저술, 사진, 디자인, 사회운동 등 다방면에서 성공적인 활약상을 보여준 세계 최초 여성 만능 엔터테이너이자 독보적 멀티 플레이어로 평가되고 있어요. 게다가 그녀의 인기는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9년 9월 무려 63번째 정규앨범 ‘Love Is the Answer’를 발표하여 건재함을 과시하였기 때문이지요. 이에 그치지 않고 이 앨범은 당시 같은 시기 발매되었던 후배 가수 마돈나와 머라이어 캐리의 새 앨범을 누르고 통산 9번째 빌보드 앨범차트 1위 기록이라는 대단한 저력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빌보드 역사상 여성 솔로가수 역대 앨범차트 1위 기록(통산 9장 1위) 및 미국에서만 총 7100만 장 이상의 판매와 전 세계 1억5000만 장 이상의 판매 기록을 보유하고 있죠,

더군다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10번의 그래미상 수상, 수차례의 아카데미상과 골든 글로브상, 토니상, 에미상, 피바디상. 프랑스 최고문화예술훈장인 ‘레지옹 도뇌르’까지 이 시대 최고의 문화예술 관련 저명한 상들은 모조리 휩쓸었으며, 2008년에는 케네디센터 평생공로상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죠.

임형주 팝페라테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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