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남]장애 경주마가 밝혀주는 장애인 선수의 꿈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13일 03시 00분


경마 최단기 700승 김영관 조교사, 영화화된 ‘루나’ 명의 2500만원 기부
뇌성마비 보치아선수 정모씨 수혜

2009년 장애 경주마 루나 은퇴식 당시 김영관 조교사(왼쪽)와 이성희 마주가 함께 했다. 렛츠런파크 부산경남
2009년 장애 경주마 루나 은퇴식 당시 김영관 조교사(왼쪽)와 이성희 마주가 함께 했다. 렛츠런파크 부산경남
한국 경마 사상 최단기 700승을 달성했던 조교사(말을 훈련시키고 사육하는 사람) 김영관 씨(54)는 12일 오후 한국마사회 렛츠런파크 부산경남(옛 부산경남경마공원)에서 2500만 원을 부산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했다. 기부는 김 조교사가 했지만, 기부 명의자는 ‘루나’라고 적혀 있었다. 라틴어로 ‘달’(어두운 곳을 비춘다)이란 뜻의 루나는 영화 ‘챔프’의 실제 주인공인 경주마. 장애가 있어 다리를 절뚝거리는 경주마라 모두가 외면했지만 김 조교사가 운명처럼 만나면서 지은 이름이다.

김 조교사는 역경을 딛고 경주로를 지배했던 루나처럼 장애인 운동선수에게 희망을 전하기 위해 ‘루나기부금’을 만들었다. 스포츠를 통해 꿈을 이루려는 저소득 장애인에게 전달키로 한 것. 첫 번째 수혜자는 뇌성마비 장애1급이면서 ‘보치아’(표적구에 가깝게 공을 던지는 경기) 부산 대표선수인 정모 씨(31)로 정해졌다. 기부금은 정 씨의 훈련도구 구입과 생활비 지원에 쓰인다.

김 조교사와 루나는 10여 년 전 인연이 닿았다. 2003년 부산경남경마공원 개장 당시 김 조교사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루나를 택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인대염으로 두 뒷다리를 저는 말이었다. 그는 “비록 다리를 절었지만 얼굴이 작고 눈이 초롱초롱했다”며 “심폐기능이 뛰어난 말의 특징인 넓은 어깨를 지녀 가능성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당시 루나는 역대 최저가인 970만 원에 낙찰됐다. 김 조교사는 수술 대신 훈련 방법을 달리했다. 허리를 강하게 하고 스피드를 올려 나갔다. 각고의 노력 끝에 루나는 2005, 2006년 경남도지사배와 2007년 KRA컵 마일, 2008년 오너스컵 등 큰 대회를 석권했다. 2009년 11월 은퇴할 때까지 7억5700만 원의 상금을 벌었다. 몸값의 78배다.

2011년에는 루나의 이야기를 소재로 차태현 주연 영화 ‘챔프’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현재 13세인 루나는 제주 더비랜드 목장에서 씨암말로 살아가고 있다. 다음 달에는 루나의 자마(새끼)가 렛츠런파크 부산경남에 입사할 예정이어서 벌써부터 기대를 모으고 있다.

김 조교사가 루나에 애착을 갖게 된 것은 자신의 삶을 닮았기 때문이다. 1976년 기수 생활을 시작했지만 체중 조절 실패로 마필관리사로 전향했다. 하지만 조교사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관리사로는 자신만의 마필 관리 철학을 펴기 어려웠다. ‘왕따’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런 그에게 부경경마공원이 개장하면서 조교사의 길이 열렸다. 그리고 희대의 명마 루나를 만났다. 덩달아 그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김 조교사는 40여 마리를 관리하는 스타 조교사가 됐고 그의 관리 말은 대부분 우수한 성적을 내 700승이란 대기록을 세웠다.

“다리가 아파 눈물을 보이면서도 루나는 중도 포기 없이 결승선을 통과했지요. 신은 하나를 안 주면 다른 하나는 반드시 줍니다. 루나가 나에게 진정한 인생의 길을 열어준 만큼 다른 사람에게도 꿈을 심어주길 바랍니다.”

조용휘 기자 silen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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