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 속도계 바늘이 131km를 가리켰다. 고속도로 제한속도(시속 100km)를 크게 웃도는 속도. 하지만 가속페달을 밟은 오른발에 계속 힘이 들어갔다. 1차로와 2차로를 오가며 앞서 가던 차량 3대를 추월했다. 속도계 바늘은 계속 올라갔지만 브레이크를 밟는 경우는 드물었다. 순간 눈앞에 비상등을 켠 채 정차 중인 승용차와 수신호 중인 운전자가 들어왔다. 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었지만 승용차와 운전자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실제는 아니지만 기자가 직접 술을 마시고 차량 시뮬레이터를 이용해 진행한 음주운전 실험 내용이다. 실제였다면 인명 피해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지난해 2만6589건의 음주 교통사고로 727명이 사망하고 4만771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음주 교통사고의 치사율은 2.7%로 전체 교통사고 치사율(2.4%)보다 높다. 동아일보 ‘시동 꺼! 반칙운전’ 취재팀은 4일 도로교통공단 교통과학정책실의 도움을 얻어 차량 시뮬레이터를 이용한 실험을 직접 해봤다.
○ 브레이크 없애버린 음주
취재팀은 음주 전후 가상의 도로를 주행해보고 △속도 및 시간 △가속 페달 및 브레이크 답력(밟는 데 필요한 힘) △차량편측위치(차량이 좌우로 움직인 정도) △핸들 조작 각도를 산출해 비교했다. 실험에 사용된 가상의 도로는 3.4km 도심 코스와 9.4km 고속도로 코스로 운전 능력을 알아보기 위해 장애물이나 사고 등 여러 돌발 상황을 설정해 놨다. 차량 시뮬레이터는 실제 차량을 그대로 옮겨온 탑승석과 차량 앞에 놓인 3대의 모니터를 통해 실험 목적에 맞는 다양한 운전 상황을 재현할 수 있다.
기자는 4일 오후 소주 한 병을 마신 뒤 도로교통공단 교통과학정책실 실험실에 마련된 차량 시뮬레이터에 앉았다. 음주 상태에서 고속도로를 달렸더니 평균 속도는 시속 76.1km, 최고 속도는 시속 148.0km가 나왔다. 음주 전 같은 코스에서 나온 평균 속도 시속 65.5km보다 시속 약 10km나 빨랐다. 술을 마신 뒤 가속페달을 밟는 힘은 15.5% 커지고 브레이크를 밟는 힘은 30.1%나 줄었다. 가속과 감속이 들쑥날쑥하면서 속도를 줄여야 할 때 제대로 줄이지 못하는 특징을 보였다.
음주 전 고속도로 코스에서 1번의 교통사고를 내고 3번의 속도위반을 했던 기자는 음주 후 같은 코스에서 3번의 교통사고와 6번의 속도위반을 하며 반칙운전자로 돌변했다. 실험을 진행한 오주석 연구원은 “음주 상태에선 ‘운전을 빨리 끝내고 싶다’는 욕구가 강해져 과속이나 추월 등의 행태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며 “전방주시력이나 신체반응속도도 떨어져 사고로 이어질 위험성이 높다”고 말했다.
도로교통공단이 20∼40대 운전자 26명을 대상으로 음주운전 실험을 한 결과도 기자의 실험 결과와 유사했다. 술을 마신 뒤 운전자들의 평균 속도는 시속 4km가 빨라졌고 주행시간은 27초 단축됐다. 실험 결과에 따르면 음주운전자의 속도·가속페달 답력·차량편측위치가 모두 증가해 주행안전성이 떨어지고 술의 영향으로 속도에 대한 지각능력 및 차로 유지 능력이 저하된 것으로 나타났다.
○ 운전자 34.5% “소주 반병은 괜찮아”
많은 운전자가 음주운전의 위험성은 알지만 실제 알코올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보 취재팀이 20∼50대 운전자 12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90.2%가 ‘음주가 운전능력을 저하시킨다’고 답했지만 34.5%가 ‘운전 전 소주 몇 잔까지 마셔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에 ‘소주 서너 잔 이상’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실제 소주 서너 잔은 혈중알코올농도 0.05% 이상이 나올 만한 양이다. 운전자들이 알코올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의미다. 일반적으로 체중이 70kg인 성인 남성이 소주 2잔(100mL)을 마신 후 30분에서 90분이 지나면 혈중알코올농도 0.05%에 도달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소주 1잔으로도 음주운전 법정단속기준인 혈중알코올농도 0.05%가 나올 수도 있다.
‘소주 한 병을 마신 뒤 몇 시간이 지나면 운전을 해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33.6%(41명)만이 ‘8시간 이상’이 지나야 한다고 답했다. 4시간 전에도 괜찮다는 답변이 15.6%(19명)였다. 보통 성인은 혈중알코올농도가 시간당 약 0.015% 감소한다. 즉, 소주 한 병을 마시고 혈중알코올농도가 0.1% 이상이 됐다면 최소 7∼8시간의 휴식이 필요하다. 장택영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아직까지 우리나라에 음주에 관대한 문화가 남아 ‘몇 잔쯤은 괜찮겠지’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며 “한 잔도 운전에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음주운전의 원인으로 가장 많은 답변은 “목적지가 가까워서”(26.4%)였다. ‘잠깐 운전대를 잡는 건 괜찮겠지’라는 생각이 음주운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아무리 짧은 거리라 해도 모두 음주운전으로 처벌 받을 수 있다. “차를 안 가져가면 다음 날 불편해서”(19.3%), “술을 몇 잔 안 마셔서”(15.7%) 등의 이유도 음주운전을 합리화하는 이유로 꼽혔다. 응답자 122명 중 24명(19.7%)만이 음주운전의 충동을 한 번도 느끼지 않았다고 답했다. ▼ 음주 교통사고 21% 낮시간대 일어나… 2013년 건수 줄었지만 여성은 4.9% 늘어 ▼
빅데이터로 분석해보니…
본보 취재팀이 보험개발원의 최근 5년간 음주 교통사고 현황을 분석한 결과 음주운전이 특정 기간이나 시간대 구분 없이 두루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음주운전은 심야에만 집중됐을 것이라는 상식을 뒤집는 통계다.
보험개발원 음주 교통사고 통계에 따르면 월별로는 11월에 사고가 가장 많았고 시간대별로는 오후 10시∼밤 12시에 가장 빈번했다. 월평균 음주 사고는 3458건으로 매달 꾸준히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간대별 음주 교통사고 발생 현황을 보면 밤 시간대의 사고비율이 높았지만 낮 시간대(오전 6시∼오후 6시)에 발생하는 음주 교통사고도 전체의 21.1%를 차지했다. 밤뿐 아니라 낮에도 음주운전이 적지 않게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보험개발원은 혈중알코올농도 0.05%이하이거나 이보다 과한 음주 상태지만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처리한 사고 사례까지 포함하고 있어 경찰보다 더 많은 사고통계치를 갖고 있다. 경찰 통계에는 잡히지 않고 보험개발원 통계에만 포함된 사고 비율은 2011년 32.7%에서 지난해 39.8%로 증가세다. 보험개발원은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처리하는 교통사고 중 상당 부분이 음주 관련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성 운전자가 증가함에 따라 여성 운전자의 음주 교통사고 비율도 높아졌다. 지난해 전체 음주 교통사고는 2012년과 비교해 줄었지만 여성 운전자 음주 교통사고는 2012년 4285건에서 4496건으로 4.9%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음주에 관대한 사회 분위기가 개선되어야 음주운전을 근절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임주혁 보험개발원 통계팀장은 “과거 통계를 보면 음주 교통사고 발생건수가 경찰 단속 등 외부 요인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아 왔다”며 “단속을 강화하고 음주운전의 처벌 기준을 높이는 방법이 국민의 경각심을 높여 사고를 줄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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