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대로 다 퍼주는… 노숙형제들의 대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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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뚜기와 함께 하는 오뚜기 인생]서영남 민들레국수집 주인장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당신은 참 좋은 사람입니다!” 노숙형제들에게 아낌없이 사랑과 밥을 퍼주는 서영남 민들레국수집 주인장. 그는 ‘어미품에 안긴 아기처럼, 하느님 품에 안긴 젖먹이처럼 살고 싶다’고 말한다. 인천=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당신은 참 좋은 사람입니다!” 노숙형제들에게 아낌없이 사랑과 밥을 퍼주는 서영남 민들레국수집 주인장. 그는 ‘어미품에 안긴 아기처럼, 하느님 품에 안긴 젖먹이처럼 살고 싶다’고 말한다. 인천=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서영남 민들레국수집 주인장(60)은 참 선하게 생겼다. 둥글둥글 착한 물기가 뚝뚝 흐른다. 눈과 입꼬리는 늘 웃고 있다. ‘사랑의 에너지’가 철철 넘친다. 그는 12월 1일 필리핀 빈민가에서 돌아왔다. 4월에 갔다가 ‘필리핀민들레국수집’을 뚝딱 만들어 놓고 왔다. 그의 빈자리는 딸 모니카(서희·30)가 곧바로 날아가 채웠다. 내년 1월엔 그가 다시 간다.

서영남은 대한민국 으뜸 마음부자다. 그의 문어발식 ‘퍼주기 사업’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장되고 있다. 문제는 죄다 쓰기만 한다는 것. 그래도 그는 정부지원을 일절 받지 않는다. 후원회나 자원봉사자 조직 같은 것도 없다. 조직은 결국엔 배타적이 된다. 그게 싫다. 무슨 프로그램 공모에도 관심이 없다. 그는 천하태평이다.

2003년 문을 연 인천 화수동 민들레국수집(무료)은 하루 400∼500명의 배고픈 형제들이 찾는다. 쌀만 하루 80∼100kg씩 동이 난다. 노숙형제들이 몸을 씻고 책도 읽고 상담도 하는 민들레희망지원센터는 이제 회원이 2800여 명에 이른다. 노숙형제들에게 두툼한 겨울잠바나 신발을 무료로 챙겨주는 민들레가게도 잘되고 있다. 노숙형제들에게 단칸방을 얻어줘 자립을 돕는 일도 계속하고 있고, 민들레진료소도 하루 100여 명의 가난한 이웃들을 무료로 진료한다. 지난해엔 밥 굶는 노인들을 위해 ‘어르신민들레국수집’을 열었다. 포스코 청암상금 2억 원을 받아 1억 원을 이곳에 썼다. 나머지는 필리핀민들레국수집 만드는 데 들어갔다.

“하루하루가 아슬아슬하지만 단 한 번도 쌀이 떨어진 적 없다. 하느님이 늘 채워 주신다. 노숙형제들은 마음이 여리다. 식판에 계란프라이 1개만 더 얹어줘도 어쩔 줄 모른다. 행복해한다. 겨울옷가지도 좀더 가져가라 해도 꼭 필요한 만큼만 챙긴다. 노숙하는 데 가장 귀찮은 게 짐이라며. 아닌 게 아니라 노숙초보들의 짐이 유독 많다. 난 가장 편한 선택을 했다. 아래로 내려가는 것만큼 쉬운 게 어디 있는가. 가난하고 약한 분들은 조금만 도와드려도 펄떡펄떡 뛰어오른다. 예수님처럼 살기, 자유롭게 살기, 이웃사랑하며 살기가 내 꿈이다. 난 성경말씀 중에 ‘어미 품에 안긴 아기처럼’이란 구절이 가장 좋다. ‘하느님 품에 안긴 젖먹이처럼’ 사는 게 행복하다. 국숫집하면 돈벼락 맞을 일도 없고, 흔들릴 일도 없다.”

사실 그의 민들레국수집 메뉴엔 국수가 없다. 처음엔 국수로 시작했지만 노숙형제들은 밥을 원했다. 국수는 배가 쉽게 꺼지기 때문이다. 식당은 4인용 탁자 6개 규모로 아담하다. 뷔페식으로 밥, 국에 반찬이 예닐곱 가지나 된다. 커피와 과일후식도 있다.

식당 밖의 손잡이엔 ‘(찾아주셔서)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글귀가 붙어 있다. 식당 안에도 ‘당신은 참 좋은 사람입니다’ ‘바라만 보아도 좋은 사람아’ ‘평화가 너희와 함께’ 같은 글귀가 걸려 있다. 배고픈 사람은 누구나 하루에 몇 번이고 와서 먹을 수 있다. ‘고맙다’는 말이 곧 밥값이다. 남기지만 않으면 된다. 계산대도 가격표도 종업원도 없다. 멀리 수원 천안 평택이나 서울 노숙형제들도 많이 찾는다. 주방엔 그날그날 봉사자들이 조용히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한다.

“밥 한 그릇보다 사람대접이 훨씬 소중하다. 마음과 머리도 배부르게 해줘야 한다. 봉사는 평등하다. 베푼다는 말에는 ‘동정’의 뜻이 들어있다. 내가 쓰고 남은 것을 주는 느낌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니라 사랑이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 세상의 어느 엄마가 자식에게 밥 해주고 생색내는가. 건방 떨면 안 된다. 우리 식당엔 선착순이나 줄서는 게 없다. 늦게 오셨더라도 가장 배고프고 힘든 분 먼저 드시는 게 원칙이다. 그분들은 품위 있게 밥 먹을 권리가 있다. 노숙형제들은 대부분 경쟁사회에서 밀려난 분들이다. 가족이나 친구까지 모두 버렸다. 마음이 황폐해졌다. 10년 함께 노숙하면서 옆 사람 이름도 모른다. 이분들에게 이웃을 찾아주고 사랑을 알게 해줘야 한다. 반갑게 인사해주고, 이름 불러주고, 섬겨줘야 한다. 그러면 언젠가 스스로 변한다. 잔소리는 독약이다. 예수님이 어디 잔소리하는 거 봤는가.”

서영남은 1954년 부산 범내골 판자촌에서 태어났다. 7남매(4남 3녀) 중 다섯째, 아들로는 셋째. 신의주 용천이 고향인 아버지는 열차사고로 돌아가셨다. 그가 초등학교 1학년, 막내가 갓 돌을 지났을 때였다. 어머니(94)가 삯바느질로 자식들을 키웠다. 어릴 적 잠결의 어머니 재봉틀 소리는 그에게 자장가처럼 아늑했다. 어머니는 신의주 비현성당을 다녔을 정도로 신앙이 독실했다. 1976년 서영남이 수도원에 들어가겠다고 하자 춤을 추며 기뻐하셨다.

“난 형제 중에서 가장 못됐다. 어머니는 그런 나에게 늘 ‘착하게 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살려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런데 갈수록 편해지기만 했다. 언젠가부터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사다리 타고 위로만 올라가는데, 난 ‘사다리 타고 밑바닥까지 내려가고’ 싶었다. 꼴찌들이 먼저 대접받는 세상, 가난한 사람들이 우선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결코 조직이나 단체에 함몰돼 내 자신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난 결심했다. 앞으로 절대 넥타이 매지 않겠다고. 무엇이든 남과 경쟁하지 않겠다고. 죽어도 폼 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25년 동안 정들었던 수도원을 나왔다. 2011년 청와대에서 훈장(석류장)을 받을 때도 ‘넥타이 매고 오라면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괜찮다고 하더라. 내가 손해 보겠다고 생각하면 이 세상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다.”

서영남은 장애인이다. 어릴 적 크게 다쳐 오른손을 잘 못 쓴다. 한때 열등감에 시달렸다. 부끄러워 숨기려고 애썼다. 이도 틀니다. 1988년 필리핀 파견생활 중 마지막 남은 하나를 뽑았다. 허리도 부실하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을 그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여긴다. 이 덕분에 몸이 불편한 노숙형제들이나 이가 없는 어르신들의 심정을 알게 됐다.

그는 수도원에서 환속한 사람이다.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어느 성당 강연을 가서 제대(祭臺)에 서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 가톨릭 경향잡지(1906년 창간)에 자신의 얼굴이 표지에 나왔다. 깜짝 놀랐다. 환속 수사로선 강기갑 전 국회의원에 이어 두 번째였다. 그는 ‘홀로아리랑’을 즐겨 흥얼거린다. 그냥 좋다. 담배는 7년 전에 끊었다. 술은 가끔 조금씩 아내와 홀짝거린다.

“힘든 적 없었느냐고?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짜증난 적도 없었다. 난 지상에서 천국처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더 낮은 곳이 있으면 내려가고 싶다. 노숙형제나 교도소형제는 관리대상이 아니다. 기다려주고 참아주면 언젠간 스스로 변한다.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라는 걸 알면 마음이 스르르 열린다. 처음엔 혼자 살게 내버려두고 존중해주면 된다. 기를 꺾으면 안 된다. 수도원같이 그 좋은 곳에서 살아도 안 변하는 사람이 있다. 오래 기다려줘야 한다. 김남주 시인의 ‘사랑’이란 노래처럼.”

‘사랑만이/겨울을 이기고/봄을 기다릴 줄 안다//사랑만이/불모의 땅을 갈아엎고/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릴 줄 안다//천년을 두고/봄의 언덕에/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줄 안다/그리고 가실을 끝낸 들에서/사랑만이//인간의 사랑만이/사과 하나 둘로 쪼개/나눠 가질 줄 안다.’

필리핀민들레국수집의 베베모가족공동체. 그들은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고 있다. 서영남 민들레국수집 주인장 제공
필리핀민들레국수집의 베베모가족공동체. 그들은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고 있다. 서영남 민들레국수집 주인장 제공
▼신혼여행 대신 청송교도소서 봉사활동… 딸이 ‘가업’ 이어나가▼

운명처럼 찾아온 아내 베로니카와 딸 모니카


“어느 날 두 사람의 눈길에 벼락이 내리쳤다. 그리고 나에게 호박이 덩굴째 굴러들어왔다. 횡재도 그런 횡재가 없었다.”

서영남이 아내 베로니카(56)를 두고 하는 말이다. 두 사람은 2002년 12월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청송교도소(현재 경북북부교도소)로 다녀왔다. 딸 모니카도 함께였다. 신혼여행이 아니라 ‘가족 교정사목여행’이 된 것이다. 모니카는 그때 난생 처음 교도소에 들어가 봤다. 그리고 그 이후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꼭 재소형제들을 찾아갔다.

서영남은 아내를 교도소 봉사활동하면서 처음 만났다. 아내는 후원자였다. 동인천 지하상가에서 자그마한 옷가게를 하며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빠듯한 살림에도 수익의 대부분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재소형제들의 영치금은 물론이고 40∼50명이나 되는 분들과 따뜻한 편지를 나눴다. 다음은 아내 베로니카의 기억.

“수도원을 떠났다는 수사님이 어느 날 불쑥 우리 옷가게에 나타나셨다. ‘겨자씨의 집’을 만들어 출소형제들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하셨다. 반가웠다. 그날 마침 형제 중 한 분이 생일이라는 말에 겨자씨의 집 식구들을 모두 초대해 불고기 파티를 해드렸다. 그 후 언젠가 김치를 담가 겨자씨의 집을 찾았더니, 가족들이 술에 취해 서로 다투고 있었다. 수사님은 한쪽에서 묵묵부답 오도카니 지켜볼 뿐이었다. 가슴이 아팠다. 저분도 편안하게 쉴 시간이 필요하실 텐데, 그래야 오래오래 이웃사랑을 하실 텐데…. 난 한참 주저하다가 말을 꺼냈다. ‘저희 집으로 오셔서 잠이라도 편히 주무세요. 마침 방 3개 중 하나가 비어있습니다.’ 딸 모니카에겐 이미 승낙을 받은 뒤였다. ‘엄마가 행복하다면 무조건 좋아요. 난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빠가 생겨서 좋고’라고 했다. 고마웠다. 사실 모니카는 고교시절 힘들 때마다 수사님을 찾아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공부하라’는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 지금도 모니카는 ‘스승이자 친구인 아빠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고 말한다. ‘아빠로부터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며 행복해한다. 난 그렇게 딸의 수능시험이 끝난 후 꿈도 꿔본 적이 없는 결혼을 했고, 수사님의 길동무가 되어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고 있다.”

서영남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막상 결혼을 하려니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평생 돈 한 푼 벌어본 적이 없는데 과연 가족을 책임질 수 있을까. 그건 가당치도 않은 욕심 아닐까. 그의 혼수는 아내와 딸을 위해 직접 만든 침대보 4장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의 가슴엔 따뜻한 사랑이 있었다.

서영남의 본업은 어디까지나 교도소의 교정사목(矯正司牧)이다. 민들레국수집이 아니다. 수도원시절부터 지금까지 재소형제들과 편지를 나누고, 면회 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형기는 몰라도 죄명은 절대 묻지 않는다. 자기소개, 음식 나눔, 자신의 부고기사 써보기, 낙엽 보며 느낀 점 말해보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이뤄진다. 서영남이 주로 진행하고 아내와 딸은 음식 나눔에 신경을 쓴다.

방문하는 날은 주로 국숫집이 쉬는 목, 금요일이다. 청송교도소엔 장기수 무기수 형제가 많다. 그곳에 갈 땐 온 가족 소풍날이나 마찬가지다. 가족 여름휴가도 어김없이 그곳으로 향한다.

오전 4시에 출발해도 오후 11시나 돼야 집에 돌아온다. 한 번에 보통 150만∼200만 원의 영치금과 김밥, 빵, 과자, 초콜릿, 떡 등 100인분 가량을 준비한다. 부모나 친척이 없어 ‘법자(법무부 자식)’가 돼버린 형제들은 뼈가 시리도록 외롭다. 최소한의 생활비도 없다. 사실 교도소에서 지급물품으로만 살기란 어렵다.

“난 엄청난 행운아다. 내가 만약 아내와 딸을 만나지 않았다면 민들레국수집을 이만치라도 꾸려올 수 있었을까. 가족의 헌신과 응원이 없었다면 출소형제들과 지금처럼 도타운 정을 나누며 살 수 있었을까. 딸 모니카는 올 3월 법무부 최연소 교정위원이 됐다. 교정위원이란 법무부 장관의 위촉을 받아 재소형제들을 위해 활동하는 자원봉사자를 일컫는다. 교정위원은 보통 40, 50대 남성이 대부분인데 고맙게도 예쁜 딸이 나의 대를 이었다. 뿌듯하다. 딸 모니카의 교정사목 경력은 11년, 아내 베로니카는 20년, 베드로인 나는 30년, 이렇게 우리 ‘베베모 가족’은 모두 61년 동안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 집 가훈은 첫째 소유로부터의 자유, 둘째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기쁨, 셋째 아름다운 세상을 위한 투신이다. 그걸 하나하나 실천하며 재미나게 살고 있다. 집에서도 내가 음식을 만들면 딸이 식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한다. 아내는 집 안 구석구석 깨끗하게 쓸고 닦는다. 하루 일이 끝나면 그날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함께 웃고 함께 슬퍼한다. 그렇다고 가족이 예수님보다 앞서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첫째는 예수님이고, 둘째가 가족이다. 교정사목과 민들레국수집은 그 다음이다. 난 아내와 딸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국숫집을 그만둘 수 있다. 모든 것을 양보하고 포기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만큼은 결코 아니다.”

:: 서영남 약력 ::

▽1954년 부산 범내골 출생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입회(서울 성북동·1976) ▽종신서원(1985) ▽가톨릭교리신학원졸업(서울 혜화동·1984) ▽전국교도소 장기수 면담 활동(1995∼)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정사목위원회에 파견돼 출소형제들과 ‘평화의 집’에서 생활(2000) ▽환속 후 출소자공동체 ‘겨자씨의 집’ 세워 그들과 생활(2000) ▽노숙형제들을 위한 무료식당 ‘민들레국수집’ 문 열어(2003)

▼저서

▽사랑이 꽃피는 민들레국수집(2005) ▽민들레국수집의 홀씨 하나(2010)

▼서영남 주인장의 민들레그룹

▽ 민들레국수집(2003∼) ▽민들레꿈 어린이공부방(2008∼) ▽민들레희망지원센터(2009∼) ▽민들레꿈 어린이밥집(2010∼) ▽민들레책들레도서관(2010∼) ▽민들레진료소(2010∼) ▽민들레가게(2010∼) ▽어르신들을 위한 민들레국수집(2013∼) ▽필리핀민들레국수집(2014∼) ▽필리핀민들레 빵공장(2014∼)

♣상훈 ▽MBC사회봉사대상 본상(2008) ▽제1회 국민추천포상 국민훈장 석류장(2011) ▽일가상(사회공익부문·2011) ▽포스코 청암상 봉사상(2013)

♥후원=농협 147-02-264772 서영남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청송교도소#민들레국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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