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사회로 가는 대한민국의 과제’]
제1심포지엄: 선진사회의 기반, 공공성을 확립하자
인촌기념회-동아일보-채널A-고려대 공동주최
“갑질과 떼법, 法으로 뿌리뽑자”
《 인촌기념회와 동아일보, 채널A, 고려대가 6일 공동 주최한 ‘선진사회로 가는 대한민국의 과제’ 심포지엄에서는 공공성 붕괴의 원인과 대안을 놓고 뜨거운 토론이 벌어졌다. 특히 우리 사회의 공공성을 높이기 위해 큰 정부가 필요한지, 민간 자율성을 확대해야 할지 등에 관한 견해차가 첨예했다. 동아일보는 공공성 확립을 위한 5대 제언을 정리해 사회적 논의와 실천의 토대로 삼기로 했다.》
선진국의 문턱에 선 대한민국을 더이상 전진하지 못하게 만드는 ‘공공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득권층의 위법행위나 특정 집단의 ‘떼법’에 대해 엄정하고 공정한 법집행이 확립돼야 한다는 데 전문가들의 의견이 모아졌다. 비효율적인 정부와 정치의 역할을 재검토하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확대해야 한다는 제언도 쏟아졌다. 인촌기념회와 동아일보, 채널A, 고려대가 6일 고려대 경영관에서 공동 주최한 ‘선진사회로 가는 대한민국의 과제’ 첫 회 심포지엄에서는 이와 함께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도덕적 책임) 적용 대상을 확대하고 시민윤리 확산을 위한 교육 혁신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 기조강연… 성숙한 시민사회 향한 공공의 철학 ▼
황경식 서울대 명예교수
이기심, 도덕심으로 대체 못해… 생활속에서 ‘공덕심’ 체득해야
오늘날 한국사회는 오랜 세월 길들여져 온 ‘우리’라는 이데올로기에서 갓 깨어난 개인들이 저마다 권리와 이익을 내세우며 서로 협상·조정하는 합리적 대화에 서툰 원색적 이기주의(primitive egoism)의 수라장을 방불케 한다. 전통사회가 무너지면서 나타나는 개인의 원초적 이기심을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합리적 이기주의자들의 신사협정으로 만든 것이 법체계이고 시민윤리다. 이기심을 억압하거나 전통적 도덕심으로 대체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각자가 주장하는 이익이 상충하며 갈등하는 가운데 조정의 원리를 찾아내고 이것이 새로운 윤리의 바탕이 되게 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위험사회인 것은 위험요인이 있는 곳곳에 우리를 지켜줄 매뉴얼이 갖추어져 있지 못하고, 매뉴얼이 있어도 상황에 특유한 디테일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모든 공부가 그러하듯 시민의식이나 시민윤리도 하루아침에 체화되기 어렵다. 아직 우리는 근세 시민사회적 학습에서 학(學)의 단계에 있을 뿐 오랜 습(習)을 통해 생활화하지 못하고 있다. 다양한 상황과 관련된 케이스를 발굴하고 갖가지 갈등상황 속에서 해결책을 찾아나가는 구체적 연습을 통해 공덕심(公德心)을 체득해야 한다.
▼ 제1주제… 한국의 정치·사회에서의 공공성 ▼
임혁백 고려대 교수
이념적 갈등으로 공동체 분열… 시민참여 활성화로 아픔 치유를
정부와 시민사회는 모두 세월호 참사 처리를 공공성의 원칙에 따라 처리하는 데 실패했다. 정부는 책임성 공정성 공개성을 보여주지 못했고, 일부 시민사회는 이념적으로 대응하여 정부를 정치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아픔의 치유를 통해 공동체를 회복하기보다는 분열을 심화시켰다. 한국의 역사에도 공공성의 정치 사회적 전통이 존재했다. 조선 초기 의정부의 합의제적 국정 심의와 국왕-학자관료 사이의 경연제도, 언관제도 등에 의한 중앙정부의 공론정치와 지방의 재야유학자 집단에 의한 유교적 시민사회, 민중적 노동공동체인 두레가 그것이다. 광복 이후 분단과 전쟁으로 다원주의적 공론의 장이 막힌 가운데서도 농지 분배, 보편적 교육 실시 같은 공공성이 풍부한 공공 영역이 발전해 4월 혁명과 민주주의 회복을 가능케 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언론자유의 확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제도의 진전, 시민 참여의 제고 등으로 정치 사회의 공공성은 크게 발전했다. 하지만 ‘유교적 가산주의(家産主義)’의 부활로 공공 영역이 사유화되고 동료시민들과의 정치적 소통이 어려워짐으로써 집단이기주의가 만연하는 파당화가 심화돼 공공성을 실종시키고 있다. 시민참여적 공론의 장을 부활시키고 시장경제와 정치에서의 공공성을 회복해야 하는 이유다.
▼ 제2주제… 공인의식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
양승태 이화여대 교수
직업윤리 없인 독단주의 빠져… 정신적 품격 갖출 시민교육을
장인정신과 직업윤리야말로 공공성 형성의 기반이다. 탁월한 장인정신 없이 창조적이고 정교한 생산품은 만들어질 수 없다. 그러한 덕목의 바탕 없이 건전한 직업윤리가 작동할 수 없고 건전한 공인의식이 발현될 수 없다. 자신만의 성실하고 진지한 장인정신이나 직업윤리가 없으면서 외면적으로 내세우는 공인의식이나 정치이념은 특정한 정치집단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한 사람들은 교조적인 정치운동의 행동대원으로 전락하기 쉽다. 한국사회의 종북주의도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독단적 이념이나 신앙에 집착하는 행동을 공공성의 실현으로 믿을 때 전체주의 정당이나 광신적 종교집단이 출현한다. 지식인들부터 지적(知的) 권위와 함께 공인으로서의 사명의식과 정신적 품격을 갖춰야 한다. 그것이 사회지도층에 의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출발이다.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교양시민문화의 형성을 근원적이고 장기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초중등 교육이라는 시민교육이며, 그러한 시민교육을 주도할 의무와 책임은 대학에 있다. 한국의 시민교육 및 대학교육이 그러한 공적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할 때다. 교양 형성의 원천인 토론문화 및 독서문화가 사회 전체 차원에서 활성화돼야 한다.
▼ 제3주제… 시민정신과 공화(共和)사회 ▼
윤평중 한신대 교수
시민적 삶 체험기간 짧은 한국… 구성원 의리보다 규범 앞세워야
1000년 이전부터 상업활동을 기반으로 자유와 인권을 쟁취해가면서 법치주의와 시민정신의 탑을 쌓아온 유럽과 반세기 미만의 시민적 삶을 체험한 한반도의 현실은 다르다.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의 슈퍼 갑질도 시민정신의 축적과정을 생략한 정신사적 배경과 무관치 않다. 한국이 세계 10대 경제대국의 외형적 성과를 거뒀음에도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이 취약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경제적으로 양극화돼 있고 사회정치적으로 찢겨 있는 한국사회에 대한 종합처방전이 공화사회다. ‘더불어 조화롭게’의 미명 아래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지 않는 것이 공화사회의 필수조건이다. 시민들 스스로 정당한 것으로 동의한 법질서 속에서 누리는 책임 있는 자유가 공화사회의 진면목이다. 민주적 리더십과 주체적 팔로어십(followership)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질 때 공화사회가 가까워진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80%에 이르는 시민이 한국사회가 불공정사회라고 답하고 있으나 보수정부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가족주의 집단주의는 집단이익이나 구성원들 사이의 결속감과 의리를 사회 전체의 합리적 규범이나 법질서보다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 ▼ 종합토론… 전통사회에 공론의 場 있었나 ▼ “신라 화백회의 전통 이어가야” vs “지배층에 한정… 폐쇄성 넘어서야”
이날 심포지엄 참석자들은 우리 전통사회에 공론(公論)의 장을 통한 공공성이 과연 존재했느냐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우리 사회의 공공성 실패를 제대로 조명하려면 역사적 연원부터 파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혁백 고려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신라의 화백회의(和白會議)와 백제 정사암(政事巖) 회의, 고구려의 제가평의(諸加評議) 등을 언급하며 조선 초·중기까지 우리 전통사회에도 서양 못지않은 공론의 장이 있었음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우리 역사를 돌이켜 무너진 공공성의 전통을 다시 부활시킬 필요가 있다”고 했다.
반면 서양사학을 전공한 박지향 서울대 교수는 이를 반박했다. 우리 전통사회의 공론장은 서양의 것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영국의 과거 ‘커피하우스’에서 볼 수 있듯 서구의 공론장은 지위가 낮은 필부들도 모여 공공성을 논의한 것”이라며 지배층에 한정된 전통사회의 공론장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어 그는 “우리 것만 너무 고집하지 말고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개방성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사회를 본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는 한국의 경우 국가가 독점해온 공공성이 사회로 넘어가는 시기가 다른 나라보다 훨씬 늦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송 교수는 “한국은 공(公)의 개념을 오랫동안 국가에 헌납해왔다”며 “지금 당장 밖에 나가 사람들에게 공공성의 주체가 바로 당신이라고 얘기하면 그걸 받아들이겠느냐”고 반문했다.
과거 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낸 참석자가 변화·혁신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경험담을 내놓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교수(행정학)는 “노 전 대통령이 ‘정치를 왜 하는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계속 자문했지만 결국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며 “시간은 짧고 마음은 조급하다 보니 부작용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선진사회로 가는 대한민국의 과제’ 두 번째 심포지엄은 20일 오전 10시 고려대 경영대 LG-POSCO관에서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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