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 출신의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나 반공 이념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 북한을 다녀와서 쓴 여행기라 공감을 갖게 하는 우수도서다.”(2013년 6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문제의 책이다. 우수도서 목록에서 삭제했다.”(2015년 1월)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된 후 종북 논란을 빚은 재미동포 신은미 씨(54)의 책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에 대한 정부의 심의 결과다. 어떻게 2013년 심사에서는 ‘보수 성향의 저자가 쓴 설득력 있는 우수한 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책이 1년여 만에 북한 독재를 옹호한 책으로 바뀌었을까? 》
○ 예산 150억 원 우수도서 어떻게 선정되나?
문화체육관광부는 매년 학술 교양 문학 분야의 우수도서 1500여 종을 선정한다. 1종당 1000만 원씩, 총 150억 원의 예산으로 우수도서를 구입해 전국 공공도서관, 청소년시설 등에 배포한다.
문제는 선정 과정에 ‘구멍’이 많다는 점이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우수도서 선정에 참가했던 심사위원 10인을 인터뷰한 결과 이구동성으로 “제대로 된 심사가 이뤄지기 어려운 구조”라고 밝혔다.
우수도서는 출판사가 직접 신청하는데 보통 4∼5배가 접수된다. 한 번에 5000여 권이 신청되는 셈인데 심사위원은 150명 안팎이다. 심사위원 한 사람이 심사해야 할 책이 30권이 넘는다는 얘기다. 심사 기간은 단 하루다.
심사에 참여했던 A 씨는 “하루에 수십 권의 책을 심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직 심사위원 B 씨는 “심사위원의 상당수가 교수나 작가, 평론가다. 심사위원마다 자기 전공이 있거나 책을 쓰는 사람들인 만큼 자신이 속한 분야나 책을 냈던 출판사에 우호적일 수밖에 없다”며 암암리에 인맥이 작동된다고 밝혔다.
대학교수 C 씨는 황당했던 경험을 털어놨다. “문체부 산하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우수도서 심사 청탁 전화를 받았는데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거절했더니 담당자가 ‘책을 다 읽을 필요 없다. 하루 정도 나와 대강 골라 달라’고 하더라.”
○ 모호한 심사 기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논란
심사 기준도 문제다. 2013년까지 구체적인 심사 기준 자체가 없었고 지난해 처음 생겼다. 문체부가 밝힌 우수도서 선정 기준은 △창의성과 예술성, 내용의 충실성 △지식정보화 시대, 국가경쟁력 강화 △민족문화, 발전적 세계관 확립 등이다. 명확한 기준으로 보기 어렵다. 전 심사위원 D 씨는 “기준이 모호하다 보니 다른 심사위원이 고른 책을 ‘우수하지 않다’며 반대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우수도서’라고 평하기 어려운 책도 종종 우수도서 목록에 들어간다. 박유하 세종대 교수의 ‘화해를 위해서’는 2006년 우수도서로 선정됐다. 그러나 지난해 박 교수가 위안부 비하 논란에 휩싸인 후 뒤늦게 ‘화해를 위해서’에 일본과 독도를 공유하자는 내용이 담긴 것이 알려져 파문이 일었다. 한젬마 씨의 저서 ‘그 산을 넘고 싶다’는 2006년 우수도서로 선정된 이후 대필 논란을 겪었지만 ‘사후 처방’이 없어 여전히 우수도서 목록에 올라 있다.
○ 편향성 논란도 나와…제대로 관리 못하는 정부 탓
출판계에서는 신은미 씨의 책이 선정된 2013년 우수도서들이 논란이 될 소지가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8월 자유경제원이 개최한 ‘무엇이 편향을 부르나’ 토론회에서는 2013년 우수도서로 선정된 ‘체 게바라와 랄랄라 라틴 아메리카’, ‘나는 빈 라덴이 아니에요’, ‘비정규 씨, 출근하세요?’ 등이 반미, 반기업 정서를 지나치게 부추긴다는 비판이 나왔다. 또 다른 우수도서인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탄생’은 대한민국 건국을 평가 절하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당시 우수문학도서(문학나눔사업)는 문체부 위탁을 받은 민간단체인 재단법인 ‘책읽는사회문화재단’에서 주관했다. 현재는 공공기관인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맡고 있다.
출판사 대표 E 씨는 “문화 권력이 왼쪽으로 넘어간 것 같다. 심사위원들이 좌편향이다 보니 이념 편향 책 논란이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신은미 씨의 책을 우수도서로 선정했을 당시 수필부문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평론가 황광수 씨는 “많은 책을 검토해 누가 이 책을 우수도서로 선정하자고 추천했는지 모른다”면서 “(우수도서를 결정할) 당시 상황이 중요한 것이지, 지금 (종북) 논란이 나오니 ‘그때 나쁜 책을 뽑았다’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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