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과학기술원(GIST·지스트) 기전공학동 321호 연구실. 창업을 준비 중인 정지성 씨(30·기전공학부 박사과정) 등 4명이 23일 무릎 높이의 무인 차량에 ‘라이다(LIDAR)’로 불리는 레이저 스캐너 장비를 장착하고 주행 시험을 하고 있었다. 천천히 앞으로 이동하는 차량 위에 부착된 장비가 360도 회전하면서 연구실 내 모든 위치 정보를 수집해 실시간으로 컴퓨터에 전송했다. 모니터에는 사람이나 집기의 위치가 좌표로 계산돼 마치 평면도를 보는 것처럼 실감이 났다. 정 씨는 “국내 무인운송차량 제조업체 2곳이 우리가 개발한 레이저 스캐너 기술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기술 상용화가 가능한 올해 말이면 광(光)응용센서 전문회사 창업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학생 최고경영자’
정 씨는 지스트의 ‘캠퍼스 최고경영자(CEO)’다. 지스트는 2013년 말 창업을 꿈꾸는 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해 ‘캠퍼스 CEO 챌린지’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재학생들이 로봇청소기, 바이오센서, 정수기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제출한 사업계획서를 심사해 정 씨 등 4명을 캠퍼스 CEO로 임명했다. 정 씨는 적외선이나 영상 초음파를 사용하는 기존 로봇청소기의 센서 기능을 극복할 레이저 스캐너를 사업화할 계획이다. 김영웅 씨(30·물리·광과학과 박사과정)는 광섬유 플라스몬 공명장치(SPR) 바이오센서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SPR 기술은 생명과학, 보건의료, 환경, 식품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고 있다. 제품이 상용화되면 생명과학 관련 연구에서 유전자 분석, 혈당 젖산 콜레스테롤 측정, 신약 개발, 식품 내 중금속 이온 검출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가 기대된다.
지스트는 이들이 실패에 연연하지 않고 자유롭게 6∼9개월 동안 시제품을 개발하는 데 쓰도록 1인당 5000만 원을 지원했다. 지난해 11월 이들이 성능과 사업성을 검증받는 ‘랩(Lab) 테스트’를 통과하자 6000만 원씩을 추가로 지급했다. 이들은 올해 말 최종 평가를 통과하면 창업이 가능하다. 또 5개 과학기술특성화대학이 함께 설립한 공동기술지주회사의 자회사로서 초기 투자를 받을 수도 있다. 정 씨는 “현재 상용화 전 단계로 장비를 소형화하고 내구성을 높이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며 “레이저 스캐너 기술이 뛰어난 독일이나 일본을 따라잡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자신했다.
지스트 과학기술응용연구단(GTI)은 학생들의 모의 창업이 실제 창업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기술 마케팅 투자 창업 분야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단을 꾸려 조언을 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특징은 예비 CEO의 사업계획과 일정을 최대한 존중하고 자율성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학생 개인의 아이디어나 사업 능력에 의존하는 기존 창업 지원 프로그램과 달리 학생이 속한 실험실의 기술력을 기반으로 진행한다. 자신의 기술과 아이디어, 비즈니스 마인드를 사업 모델로 발전시켜 가는 과정을 체험하도록 해 창업 후 부딪칠 수 있는 난관을 헤쳐 갈 수 있게 해준다. GTI 박기환 단장(기전공학부 교수)은 “‘실패도 자산’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학업 중에 자기 연구 분야와 연계한 창업을 하기 때문에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 유망 기술로 신세계를 연다
지스트대학(학사과정) 박태규 씨(24)는 학부생 창업 1호다. 지난해 ‘클리커(Clicker) 앱’이란 아이템으로 회사를 차렸다. 클리커란 자신의 생각을 제3자가 모르게 상대방에게 전달하거나 의견을 수렴하는 기계장치. ‘나는 가수다’나,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 등 TV를 보면 방청객이 클리커를 누르는데 이것을 앱으로 개발하는 것이다. 박 씨는 클리커 앱을 지스트 등 학교에 강의 교재용으로 무료 배포하고 인지도를 높인 다음 여론조사업체 등에 판매해 수익을 낼 계획이다. 그는 “클리커 앱이 총선이나 대선 여론조사에 사용됐으면 좋겠다”며 웃으며 말했다. GTI의 창업진흥센터는 박 씨처럼 우수 창업아이템을 발굴하고 사업화를 지원하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고 있다.
센터는 해외 고급 인력의 국내 창업과 재외동포 및 우수 유학생의 ‘귀환(歸還) 창업’도 지원하고 있다. 지난해 5월 중소기업청의 외국인 기술창업지원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글로벌 창업 이민센터’로 선정된 것을 계기로 14명을 뽑아 창업 지원금과 사무 공간, 기숙사를 제공하고 멘토링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지스트는 지난해 6월 대학이 갖고 있는 사업성 높은 기술을 기업체와 공유하고 벤처기업을 발굴하기 위해 기술 체험형 박람회인 ‘G-테크페어(TechFair) 2014’를 개최했다. 박람회는 21년의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세계적인 연구중심대학으로 성장한 지스트의 연구 역량과 첨단 기술력을 보여줬다. 모의 창업회사 4곳을 대상으로 한 ‘모의 크라우드 펀딩’에서는 19억1600만 원이 모아졌다.
지스트의 우수한 연구 성과와 기업의 자본, 경영 노하우를 결합한 연구소기업도 건전한 창업 생태계를 만드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 ㈜인지바이오는 지스트와 ㈜인포피아,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이 2012년 공동으로 설립한 연구소기업. 지스트 김민곤 교수팀이 보유한 바이오 분야 원천기술을 활용해 차세대 진단용 바이오센서를 개발하고 있다. 2년간 연구 끝에 기존 제품보다 경쟁력이 높은 콜레스테롤 센서, 호흡기 바이러스 진단 키트 등 제품이 곧 출시될 예정이다. 진단용 바이오센서 세계 시장 규모는 연간 5조 원이다. ㈜인지바이오는 2022년까지 최대 200명의 고용 효과와 연 매출 2000억 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해 12월에는 지스트가 보유한 환경 관련 특허기술을 활용한 셰일가스 연구소 기업이 설립됐다. 지스트는 광주 전남지역의 정부출연연구소, 지방자치단체 산하 연구소, 민간 기업부설연구소 소속 연구원의 창업을 돕는 ‘기업가정신 교육센터’를 지난해 개설하고 ‘기본-심화-실전’의 3단계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 교수1인당 논문 피인용… 2014년 ‘세계 4위’ 기록… 6년만에 11계단 뛰어 ▼
‘30大 글로벌强小대학’ 도약 준비
영국의 글로벌 대학평가 기관인 QS가 지난해 9월 발표한 2014년 세계대학평가에서 광주과학기술원(GIST·지스트)은 ‘교수 1인당 논문 피인용 수(Citations per Faculty)’ 부문 세계 4위로 평가돼 세계 정상급 연구 역량을 보여줬다. ‘교수 1인당 논문 피인용 수’는 해당 대학의 평균 연구실적과 동료 연구자의 연구에 미치는 영향력을 객관적인 데이터로 보여주는 지표다. 지스트는 2008년 이 부문 세계 15위를 기록한 후 2012년 7위, 2013년 6위에서 지난해 다시 두 계단이나 뛰어올랐다.
지스트의 뛰어난 연구 성과는 설립 초기부터 교원 등 연구자들이 연구에만 몰입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시행해 온 덕분이다. 지스트는 모든 신임 교원에게 ‘스타트-업 펀드(Start-up Fund)’를 지원하는 한편 연구 업적이 우수한 교원이 정년퇴임 후에도 지스트에 남아 연구를 이어갈 수 있도록 ‘지스트 시니어 펠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교수 업적 평가 때 논문이 게재된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급 학술지의 순위에 따라 가점을 주고 질 높은 연구 성과에 대해서는 인센티브를 부여하고 있다.
재학생을 교수의 연구 파트너로 인식하고 학사·석사·박사과정 학생이 연구에 활발하게 참여하도록 하는 것도 연구 역량을 높이는 비결이다. 이 같은 시스템 덕분에 2005년 이후 졸업한 지스트 출신 박사들은 재학 중 평균 6편 이상의 SCI급 논문을 국제학술지에 게재하는 실적을 올리고 있다. 재학생 1인당 특허 출원 건수도 0.24건으로 국내 최고 수준이다.
지스트는 10년 후 종합평가에서 세계 30위권의 ‘작지만 강한 이공계 명문대’로 도약하기 위해 대학원과정의 외국인 학생 비율을 현재 10%에서 30%까지 늘릴 계획이다. 지난해에는 외국인 학생의 연구를 지원·관리하는 ‘외국인학생·연구원지원센터(ISSO)’도 설립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공동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칼텍)와의 교류 협력도 기술 이전, 창업, 기금 모금 등으로 확대하는 한편 영국 임피리얼칼리지 등 명문대와 특화 분야 연구 협력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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