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가 안 된다” “조금만 움직여도 팔, 다리가 자주 아프다” “계속 피곤하고 기운이 없다”….
경기 고양시에 사는 김모 씨(47)는 지난해부터 74세인 어머니가 유독 ‘몸이 안 좋다’는 말을 자주 해 여러 차례 병원에 모시고 갔다. 꾸준히 정기 건강검진을 받아온 어머니의 건강에는 문제가 없었다. 갈 때마다 병원에선 ‘원인이 없다’는 말만 들었다.
그러나 최근 의사는 김 씨에게 “노인들은 우울증을 겪을 때 ‘몸이 아프다’는 식의 신체 증상을 먼저 말하는 경우가 꽤 있다”며 “혹시 배우자나 가까운 친·인척이 사망했거나, 예상치 못했던 큰 변화가 있었다면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을 한번 받아보라”고 권했다. 김 씨는 지난해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살짝 걸려 어머니를 모시고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을 받았다. 상담 결과 어머니에게서 약한 우울증 증세가 나타난다는 진단을 받았다.
○ 노인 우울증, 신체 증상 먼저 나타나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노인들의 ‘전매특허 발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말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동우 상계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초기 노인 우울증 증상을 단순히 몸이 불편한 이유로 해석해 수개월, 길게는 1년 이상 다양한 종류의 검사를 하면서 원인을 찾는 경우가 많다”며 “계속 원인을 찾기 어려울 땐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을 받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의료계에선 일반적으로 65세 이상을 노인으로 분류한다. 하지만 노인 정신건강 측면에서는 70대부터가 가장 중요하다는 분석이 많다. 70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정신건강과 관련된 다양한 ‘위험 신호’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3년 기준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비율에서 65∼69세는 42.2명이다. 그러나 70∼74세와 75∼79세는 각각 59.5명과 77.7명으로 크게 높아진다. 지난해 10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이 2009∼2013년 건강보험 및 의료급여 통계 자료를 토대로 우울증 환자 현황을 분석한 결과에서도 70대 이상이 22.2%로 가장 많았다. ○ 70대부터 삶의 만족도와 의지가 크게 떨어져
60대에 비해 70대 노인들 사이에서 자살자와 우울증 환자 수 증가가 두드러지는 건 전반적인 삶의 만족도 저하와 관련이 있다. ‘2011년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65∼69세 연령대에 비해 70대 때부터 건강과 경제 만족도가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건강 만족도’의 경우 65∼69세 중 ‘불만족스럽다’와 ‘매우 불만족스럽다’고 답한 비율은 35.7%였다. 반면에 70∼74세와 75∼79세는 각각 44.7%와 51.9%였다. 경제 상태에 대한 만족도 역시 ‘불만족스럽다’와 ‘매우 불만족스럽다’는 비율이 65∼69세는 39.9%이지만 70∼74세는 45.6%, 75∼79세는 48.2%로 높아진다.
70대 때부터 인간관계의 단절이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것도 이 연령대 노인들의 정신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요인으로 꼽힌다. 배우자를 비롯한 가까운 친·인척 등 ‘인생을 같이 살아온’ 사람들의 죽음이 본격화되는 시기가 70대 때부터다. 이중선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핵가족화’ ‘노후 부담’ 등으로 과거처럼 끈끈한 부모와 자식 관계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도 노인 우울증의 큰 이유”라고 말했다. ○ 감성 소통으로 노인 우울증 예방
전문가들은 노인 우울증을 예방하는 데 가장 쉬우면서도 적절한 방법으로 ‘커뮤니케이션 활성화’를 꼽는다.
홍창형 아주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자식들과의 감성 소통, 특히 ‘1·1·1 플러스’ 원칙을 강조한다. 3개의 ‘1’은 일주일에 1번 부모에게 전화하고, 한 달에 1번 부모와 식사하고, 1년에 1번 부모와 나들이 가는 것을 의미한다. ‘플러스’는 양가 부모님 모두와 이런 시간을 가지라는 것. 홍 교수는 “‘1·1·1’을 꾸준히 시행한 자식들을 둔 노인들이 70대 이상이 되어서도 그렇지 않았던 노인들보다 우울증에 걸릴 가능성이 낮은 건 물론이고 삶의 만족도도 훨씬 높다”며 “자식이 없는 노인들에게는 자원봉사자들을 통해서라도 커뮤니케이션 기회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우울증을 치료해야 할 경우 약물치료에 대한 편견을 버리라는 조언도 나온다. 홍 교수는 “노인 환자들이 처음 우울증 약을 처방받을 때는 두려워하지만 오히려 약을 복용하면서 일상생활이 나아졌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많다”고 설명했다.
▼ 기억력 떨어지는 우울증-치매 어떻게 다른가 ▼
질문했을때 핑계대고 빤히 보면 치매… 한숨쉬며 대충 답하면 우울증 가능성
노인 우울증은 기억력 저하 현상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치매로 오해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노인 우울증을 앓을 경우 본인 스스로 혹은 주변인들이 ‘혹시 치매 아닌가’란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억력 저하 현상을 빼곤 노인 우울증과 치매는 많이 다르다.
이에 따라 치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나치게 걱정하거나 증상을 숨기면 안 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서울아산병원에 따르면 치매와 노인 우울증의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 중 하나는 ‘질문에 대한 반응’이다. 치매의 경우 노력을 하지만 제대로 대답을 못하거나 핑계를 댄다. 또 질문한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경우도 있다.
반면 노인 우울증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대충 하고, 한숨을 쉬는 식의 행동이 나타난다. 자주 자신을 비하하거나 지나치게 걱정을 하는 것도 우울증에서 많이 나타나는 모습이다.
기억 장애에서도 치매와 노인 우울증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치매 환자는 최근 발생한 일이나 나눈 대화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노인 우울증을 앓으면 오래전에 있었던 일과 최근 일을 모두 잘 기억하지 못한다.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올바로 인식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지남력(指南力)’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 치매 환자는 지남력에서 심각한 장애가 나타나지만 노인 우울증 환자의 경우는 비교적 유지되기 때문이다.
발병 속도도 치매는 서서히, 노인 우울증은 갑자기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치료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 치매는 완치 또는 증상을 완화하기 어렵지만 우울증 환자의 경우 80%는 성공적인 치료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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