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민 씨(36·여)는 얼마 전 두 아이와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려다 크게 당황했다. 서울 종로구 서울지방경찰청 앞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손을 잡고 있던 네 살 아들이 갑자기 찻길로 뛰쳐나갔기 때문이다. 깜짝 놀라 아이를 붙잡은 조 씨는 “빨간불은 건너지 말라는 약속이라고 했는데 왜 말을 안 듣느냐”며 혼을 냈다. 머쓱해진 아이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뒤 한 중년 여성이 빨간불에도 태평하게 길을 건넜다. “왜 저 아줌마는 빨간불인데도 건너가느냐”고 묻는 아들에게 조 씨는 “저렇게 신호를 어기는 건 나쁜 행동”이라고 타일렀다. 그러자 아이는 다른 남성이 또 빨간불에 길을 건너는 것을 보고 “엄마, 저기 나쁜 사람”이라고 소리쳤다. 무안해진 조 씨는 아이 입을 막고 황급히 자리를 떠나야 했다.
건널목 보행 수칙은 아이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사회적 약속이다. 유치원에서는 “빨간불 안 돼요. 노란불도 안 돼요. 파란불로 바뀌면 길을 건너요∼”라는 노래에 맞춰 안전교육을 받는다. 그런 아이들에게 신호를 어기는 어른들은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전문가들은 부모와 아이의 신뢰에 금이 가는 순간이라고 입을 모았다. 하정희 한양사이버대 청소년상담학과 교수는 “아이의 인성을 결정하는 데는 부모와의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 아이는 부모를 못 믿고, 부모는 엇나가는 자녀를 협박하는 악순환으로 빠져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선의로 한 ‘하얀 거짓말’도 조심해야 한다. 직장인 윤정호 씨(34)는 다섯 살 아들에게 더이상 “주사는 아프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다. 지난해 예방접종 주사를 맞고 온 아들이 “아빠는 거짓말쟁이”라며 토라져 일주일 동안 입을 닫았기 때문이다. 윤 씨는 아동보육 전문가에게 “아이에게는 ‘주사는 조금 아프지만 더 튼튼해지기 위해 참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라”는 조언을 듣고 실행에 옮겼다. 그러자 아이가 마음을 열었다. “주사 맞을 때 곁에서 지켜줄게”라는 약속에 아들은 다시 아빠를 믿고 의지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빨리 갔다 올게.” 서영숙 숙명여대 가정아동복지학부 교수는 당장 이 표현부터 고쳐야 한다고 제안했다. ‘빨리’에 대한 부모와 아이의 판단은 다르다. 아이는 “엄마는 빨리 온다고 했지만 3∼4시간이 지나야 오는 사람”이라는 불신이 생길 수 있다. 작은 거짓말은 습관이 돼 쉽게 고치기도 힘들다.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인간의 발달단계를 8단계로 구분하며 첫 번째로 ‘신뢰’를 꼽았다. 에릭슨은 “아이가 세상과 신뢰를 형성하는 시기는 2세 이전이며 부모의 일관성 없는 태도는 불신의 싹을 틔운다”고 했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우리 사회에서 지켜지지 않는 ‘약속’을 change2015@donga.com으로 보내주세요. 사례나 사진, 동영상을 보내주시면 본보 지면과 동아닷컴에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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