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3일 충남 천안의 한 교차로에서 20대 운전자가 뒤차 운전자를 위협하고 타이어 교체용 공구로 차 뒤쪽 유리 등을 부숴 경찰에 붙잡혔다. 범행 이유는 뒤차 운전자의 경적. 교통신호가 녹색으로 바뀐 뒤에도 맨 앞에 서 있는 버스가 출발하지 않는 바람에 서 있었을 뿐인데 뒤차 운전자가 경적을 울려 화가 났다고 한다.
자동차 경적이 도로 위 분쟁의 주범으로 떠오르고 있다. 위험을 알려 배려의 사인이 되어야 할 경적이 운전자와 보행자에게 큰 스트레스를 주면서 심지어 폭력과 범죄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한 첫걸음은 바로 경적을 때와 장소에 따라 알맞게 사용하는 것이다. ○ 1분에 10번 울리는 자동차 경적
지난달 23일 오후 6시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로터리. 7개 도로가 만나는 복잡한 구조로 서울의 상습 정체구간. 이곳은 금요일 오후를 맞아 오가는 자동차로 가득 찼다. ‘빵빵’대는 경적 소리가 여기저기서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며 일대는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가장 흔한 사례는 빨간 신호에서 녹색 신호로 바뀌기 무섭게 앞차에 경적을 울리거나 끼어들기 한 차량에 위협하듯 연이어 경적을 울리는 모습. 한 택시기사는 앞으로 끼어든 승용차를 향해 아홉 번이나 연속으로 경적을 울렸다. 모 운수의 버스는 ‘저리 비켜’라고 외치듯 경적을 울리며 좁은 자동차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도 했다. 110dB(데시벨)에 가까운 버스의 경적 소리에 바로 옆 인도에 서 있던 기자의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이날 오후 6시부터 7시까지 1시간 동안 영등포로터리를 지난 운전자들이 울린 경적 횟수는 총 583회. 분당 10번 가까이 울린 셈이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우리나라 운전자들의 경적 사용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이날 서울시내 주요 교차로 네 곳(영등포구 영등포로터리, 강남구 교보타워사거리, 동대문구 신설동로터리, 마포구 공덕오거리)을 살펴봤다. 경적 횟수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운전자들이 보여준 경적 이용 행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날 같은 시간대에 교보타워사거리, 신설동로터리, 공덕오거리에서는 각각 253회, 91회, 148회의 경적이 울렸다.
○ 경적 소리에 스트레스지수가 ‘1→9’
이같이 무차별로 울리는 경적은 소리를 듣는 운전자와 보행자 모두에게 큰 스트레스를 준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경적이 인체에 미치는 스트레스의 정도를 알아보기 위해 지난달 26일 방송인 박은지 씨와 숭실대 소리공학연구소를 찾았다. 취재팀은 배명진 숭실대 소리공학과 교수의 도움을 받아 평소 경적 소리에 따른 박 씨의 스트레스지수 변화 추이를 살펴봤다.
박 씨에게 차 안에서 듣는 경적(23∼35dB)과 차 밖에서 듣는 경적(70∼74dB) 소리를 각각 세 번 반복해 3분간 들려줬다. 자율신경균형도측정기를 통해 박 씨의 혈류 속도와 심장 박동수를 측정했다. 경적 소리를 3분간 듣자 박 씨의 분당 심장 박동수가 순간적으로 20회 가까이 높게 치솟았다. 아무 소리도 듣지 않은 상태에서 스트레스지수(0∼10등급)가 ‘1등급(안정)’에서 위험 단계인 ‘9등급’으로 치솟았다. A∼G까지 7등급으로 나뉜 피로지수도 ‘A등급(안정)’에서 ‘E등급(피로)’으로 악화됐다. 배 교수는 “박 씨처럼 경적 소리에 스트레스지수가 급격히 올라가면 면역력 저하, 부정맥 등의 각종 질환에 노출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과거 기상캐스터로 일했던 박 씨는 “바쁜 일정에 쫓기다 보니 운전할 때 습관적으로 경적을 울리곤 했는데 이렇게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줄 몰랐다”고 말했다. 실험을 마친 뒤 박 씨는 “다른 운전자들을 더 배려하고 행복한 교통문화를 만들기 위해 ‘경적 매너’가 중요하다는 걸 몸소 느꼈다. 꼭 실천하겠다”고 밝혔다.
○ 분노는 버리고 배려의 경적을 울리자
경적은 꼭 필요할 때 사용한다면 서로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지만 남발하면 소음과 고통을 만드는 독이 될 뿐이다. 현행 도로교통법에 따르면 운전자는 정당한 이유 없이 반복적으로 경적을 사용해선 안 된다. 이를 어기면 승용차 운전자에겐 범칙금 4만 원이 부과된다.
전문가들은 운전자들이 위급한 상황에서만 경적을 제한적으로 사용해야 갈등을 줄이고 교통 흐름을 원활하게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른 운전자 및 보행자와의 충돌이 우려되거나 자신의 위치를 알리려고 할 때처럼 경적이 위험을 알리는 배려의 신호로 쓰일 때 경적의 순기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다. 도로교통공단 장석용 박사는 “우리나라 운전자들이 ‘빨리빨리’문화 때문에 경적을 남발하는 경향이 있다”며 “불필요하게 경적을 울려봐야 서로 스트레스만 받고 빨리 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초보 운전자나 고령 운전자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다. 느리게 운행하는 초보 운전자에게 경적을 울리며 위협하는 사례가 많아 초보 운전 스티커를 일부러 안 붙이는 운전자도 있다.
안주석 국회교통안전포럼 사무처장은 “도로가 자신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면 마음대로 경적을 울리게 되지만 남과 나눠 쓰는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소음을 내긴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