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측보행, 시각장애인엔 ‘기습공격’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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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주제는 ‘약속’]<29>김민태군 “우측보행 지켜주세요”

시각장애 1급인 김민태 군(왼쪽에서 두 번째)이 10일 서울 중구 시청역 지하도를 우측보행으로 걷고 있다. 김 군은 우측보행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일부 시민과 충돌해 넘어질 뻔한 상황을 여러 차례 겪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시각장애 1급인 김민태 군(왼쪽에서 두 번째)이 10일 서울 중구 시청역 지하도를 우측보행으로 걷고 있다. 김 군은 우측보행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일부 시민과 충돌해 넘어질 뻔한 상황을 여러 차례 겪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앞이 안 보이는 장애인이지만 길을 나설 때마다 정말 눈앞이 캄캄해져요. 내가 걸어가는 길로 ‘약속’을 어기면서 돌진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부딪치면 지팡이를 잃어버리거나 넘어지는 일이 생길까 봐 겁이 나요. 이런 일만 없으면 지팡이나 점자 블록에 의지해서 목적지를 잘 찾아갈 수 있는데, 조금 아쉽죠.”

시각장애 1급 김민태 군(16)의 얘기다. 김 군은 사람이 많은 길에서도 안전하게 목적지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는 “학교에서 우측보행 교육을 받았다. 혼잡한 곳에서 사람들이 정해진 곳으로만 걷는다면 부딪칠 걱정이 없다”고 했다.

국토교통부는 2010년부터 우측보행을 시행 중이다. 인간의 90% 이상이 오른손잡이로 우측 보행이 편리하고, 보도에서 차와 마주 보고 걸으면 긴급한 순간에 차를 피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퇴근시간에 시민이 몰려드는 곳에서는 여전히 우측보행을 지키지 않는 사람 탓에 보행자 간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반응속도가 느린 시각장애인에게 좌측보행은 ‘기습 공격’과 같다. 기자는 10일 오후 6시 40분경 서울역부터 시청역까지 김 군과 함께 우측보행으로 이동하며 실태를 점검했다.

서울역 앞 에스컬레이터를 오를 때 김 군은 자신감이 넘쳤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에스컬레이터 손잡이가 꼭대기 근처에서 휘어지는 것을 느끼고 내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서울역 내에서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출입구에서 첫 난관에 봉착했다. 출입문은 김 군의 보행 방향 기준으로 오른쪽은 지하철역 쪽으로 나가는 문, 왼쪽은 들어오는 문으로 우측보행에 맞춰 설계됐다. 그러나 이를 지키지 않은 한 시민이 나가는 문으로 불쑥 들어와 김 군과 어깨가 부딪쳤다. 김 군은 “다들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는 줄 알았는데 놀랐다”고 말했다.

지하철 역사는 더욱 무질서했다. 서울메트로에 따르면 오후 6∼7시 서울역의 평균 승하차 인원은 1만3000명에 이른다. 김 군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무작정 이동하는 사람들을 피하느라 진땀을 흘렸고, 7분이 지체된 끝에 간신히 전동차에 오를 수 있었다. 한국교통연구원의 조사 결과 우측보행을 하면 충돌 횟수가 최대 24% 감소하고 보행 속도는 최대 1.7배 증가한다. 우측보행은 ‘보행 안전과 효율’을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수단인 셈이다.

시청역에 도착한 김 군은 지하도를 걸었다. 지하도 벽면엔 우측보행 캠페인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위험한 상황은 계속됐다. 지하도 좌측으로 한 남성이 빠른 속도로 달려와 김 군을 스치듯 지나갔다. 김 군의 표정은 일그러졌고 지팡이를 쥔 손에는 잔뜩 힘이 들어갔다. 김 군은 “보행자와 부딪쳐 지팡이를 놓치면 혼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악몽이 시작된다”고 말했다.

우측보행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법적 처벌을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측보행은 안전을 지키는 약속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김 군뿐 아니라 거리를 걷는 모든 이에게 위협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 시간 동안의 동행이 기자에게도 아찔하기만 했다. 김 군은 “자립해서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 드리고 싶다. 우측보행이라는 작은 약속만 지켜준다면 소박한 이 꿈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정윤철 기자 trigger@donga.com
#우측보행#좌측보행#시각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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