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가난했어요. 아버지는 명절마다 고민이 깊었지요. 조카들에게 세뱃돈 많이 주고 싶은 마음은 컸겠지만, 안절부절못하는 아빠 얼굴을 보니 명절이 원망스럽더라고요.”
이완정 인하대 아동복지학과 교수가 떠올린 명절 기억 한 토막이다. 가난한 친척은 어디나 있다. 5000원, 1만 원씩이라 할지라도 조카들 주다 보면 10만 원이 훌쩍 넘어간다. 그래서 이 교수는 결혼 뒤 친척들과 의논해 원칙을 세웠다. 서로 세뱃돈은 주고받지 않는다. 세배의 대가가 현찰이라는 건 교육상 의미도 없다고 봤다.
과거에 비해 명절은 빠르게 변했다. 2014년 설 연휴 기간, 인천공항을 통해 해외여행을 떠난 사람은 총 26만7000명에 달한다. 국내 유명 여행지도 가족 단위 여행객으로 북적인다. 하지만 여전히 명절이 부담스럽다는 사람이 더 많은 게 현실.
울산이 친가인 남편에게 시집온 나모 씨(34)의 친정은 충북 청주다. 어딜 먼저 가느냐로 다투던 부부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만들었다. ‘명절 당일은 시댁에서 보내되 차례 준비는 시어머니가.’
이 원칙은 잘 지켜져 명절 전 울산에 내려오고 당일까지 시댁에서 시간을 보내지만 음식은 시어머니가 미리 끝내 놓고 있다. 먼 길 다니며 아이까지 챙겨야 하는 며느리에게 일까지 시키기 안쓰럽다며 원칙을 이해해 준 시어머니 덕분이다. 나 씨는 “시어머니가 먼저 마음 써 주시니까 ‘친정에 꼭 가야지, 조금이라도 빨리 가야지’ 하는 생각은 자연스레 사라졌다”고 말했다.
‘명절증후군’이란 말이 있다. 실제 병은 아니지만 명절 하루 친인척과 모여서 지내다 보면 발생하는 현상이다. 체한 것처럼 가슴이 꽉 막히고 답답해지는 증상을 뜻한다. 고되긴 하지만 이 정도의 중증을 일으킬 만큼 가혹한 건 아니다.
음식을 준비하는 가족의 수고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금씩 배려한다면 쉽게 뻥 뚫릴 문제다. 거창할 필요도 없다. 작은 단위로 나누면 된다. 큰 아이들이 작은 아이들을 돌보게 하고, 식탁을 닦거나 수저를 놓고, 물컵을 정리하는 것이 그 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상처 내는 일도 금물이다. 특히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가장 큰 시련을 겪는 사람이 남편이다. 황현호 한국부부행복코칭센터 소장은 “가정 행복이라는 것은 부부의 행복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식도 중요하고 부모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번 설에는 친척들끼리 소통하는 법도 새롭게 가다듬어 보면 어떨까. ‘결혼 언제 하느냐’라는 말을 이미 수백 번 들었을 사람에게는 “요즘 직장에서 하는 일은 어떠니?”라고, 재수를 고민하는 고3에게는 “고생 많이 했네. 졸업을 축하한다”라는 말로, 취업 이력서를 쓰다 지친 사람에게는 “앞으로 어떤 꿈을 이루고 싶니”라며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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